시간에 기대어
저 언덕 너머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 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설움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살아있을까
후회투성인 살아온 세월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 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가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 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최진
★
사랑하던 사람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어쩌면 항상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할까.
우리는 너무나 사랑할 때 죽도록 사랑한다.
만약 헤어지게 된다면 죽겠다고 말한다.
죽도록 사랑하고, 사랑이 끝나면 죽는다.
그렇다면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사실 이미 한 번 죽은 것이다.
하지만 죽은 채 살고 있는 것이다.
덤으로 사는 시간,
그 시간을 온전히 그리움으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아직도 사랑한다고 노래한다.
죽도록 사랑하고,
죽은 채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서도 사랑한다.
사랑하는 그대가 변해버렸을지라도.
우리의 관계가 너무나 소원해져버렸다 해도.
★
SNS를 통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기 쉽게 되었다.
그러나 진짜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사람의 내밀한 삶은 아무리 SNS를 본다 해도 알 수 없다.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헤어진 연인의 집을 멀리서 바라보곤 했다.
그(그녀)의 집 주소 근처를 헤매였다.
하지만 요즘은 헤어진 연인의 SNS을 뒤적인다.
★
그러나 어쩌면 이 시의 주제는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시는
사랑이 변하고,
늙고 시들고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거나
어색해지거나
민망해지거나
만나면 불편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시간
그리워하는 시간
사랑이 없어지면 죽을 것 같았던 시간
생명력으로 가득 찼던 시간이 끝나고
그저 덤으로 살고 있을지라도
그 모든 시간들이 우리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다는 것이다.
사랑 퇴색했을지라도
사랑의 맹세가 배신으로 끝났을지라도
그러나
분노와 복수의 시간들이 지나고
화해와 용서의 시간들도 지나고
그저 인생이 점점 나이들고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야 할 시간이 정말 조금 남았을 때
그때 우리는 시간에 기대어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시인 윤동주의 말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죽어가는 것들이란
아직 죽지 않은
그러니까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산 너머 어딘가에 사랑하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고맙고 행복하다.
우리는 모두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또 우리의 시간이 다 할 때까지
그 시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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