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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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과잉 사랑의 과잉 사랑은 과잉이다 언제나 흘러 넘친다 사랑하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내게 기원이 없는 타자에게서 불어온 태풍이기에 내면의 쓰레기를 먼 바다로 내몰고 마음 한복판에 푸른 호수를 들여놓는다 사랑은 시간이 없다 역사를 허물고 미래가 정지한다 현존이 영원하리라 믿는다 사랑은 잠못든다 아주 작은 것들이 세계가 된다 입술 끝에서 우주가 흔들린다 사랑은 모든 장소를 초월하고 혀가 불탄다 수많은 형용사들이 쏟아지고 뱀들은 지혜를 읊는다 간혹 사랑의 거짓말은 사랑보다 많다 사랑이 결여하는 것은 없다 인간 스스로 파놓은 깊은 구덩이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것 사랑은 치유를 넘어 스스로이게 하는 것 침묵하면서 희생하는 행위로 타자와 일치하는 거룩함 젊은 엄마가 빵을 자르고 딸들이 오물거리며 살을 뜯어 먹을.. 2023. 8. 28.
아니 에르노 <한 여자> Annie Ernaux 는 죽은 어머니에 대한 진혼곡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쓴다는 작가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가장 특별한 경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미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부터 자신이 쓴 글에 소설이란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에르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글을 쓰면서 가 “내가 하려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저 자전적인 글쓰기일 뿐인데 가족적이면서 사회적이며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은 가족과 사회, 국가와 민족, 종교와 문화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인 .. 2023. 8. 26.
아니 에르노 <여자아이 기억> Annie Ernaux 이 소설은 일종의 메타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나와 글쓰기의 대상이 되는 나(그녀)가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현재 2014년의 어느 날들에서 1958년의 나(그녀)를 본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인상과 기억과 기록들을 되새김질한다. 그런데 되새김의 방식이 단순히 내가 그때 어땠는지를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기보다는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그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현재의 시점에서 그 상황이나 장면, 사건들을 복원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된다.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이다. 나인 그녀이다. 아니 어쩌면 현재의 나와는 다른 과거의 그녀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 시절의 그녀가 진정 지금의 나인가 회의한다. 의심당하는 것이 현.. 2023. 8. 19.
기억에 관하여 기억에 관하여 기억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러나 한 장소에 머물러 있다 어떤 나쁜 것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쁜 것이 그립다 그것이 기억의 정체성이다 진실이 숨은 장소에 붙박이는 것 자유 기억에서 풀려나는 것 기억상실증 자유에 대한 무지막지한 저항 불행을 뒤로 미루는 행위다 기억은 침묵하고 자유는 말한다 그러나 말은 거짓으로 옷 입고 벌거벗은 자유는 진실을 외치기 전 도덕의 매를 맞는다 진실이 무서운 사람들이 예술로 도피한다 예술은 폭로하지 않고 포장한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눈멀고 취하고 질식한다 기억이 미(美)로 바뀔 때 낡은 장소에는 새 건축물이 떠오른다 부요하고 여유롭고 넉넉하다 다른 시각으로 보고 기분좋게 취하고 숨을 쉴 수 있다 역설과 반전으로 기억은 자유롭다 시간이 되살아난다 기억도 나이를 먹.. 2023. 8. 17.
카페에서 카페에서 시청이 보이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그녀는 블로그에 학생들과 수업시간에 나눈 것들을 올리고 있다 주문한 커피는 몇 모금 마시지 않고 식어가고 있다 마침내 가득 담긴 커피를 발견하곤 아 내가 그렇다니까 무슨 일을 하면 지나치게 열심히 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다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주변을 돌아보는가 혹은 누가 그토록 진심으로 자기 일에 몰두 하는가 인생에서 적당히 해서 가능한 일도 있던가 카페에 와서도 스터디에 몰두하는 젊은이들도 있고 노트북에 빠진 사내도 귀에 꽂은 음악에 황홀한 처녀도 있다 일생 한 번밖에 맛볼 수 없는 평온하고 나쁜 일은 눈곱만큼도 생각나지 않는 휴일 오후 카페는 그래서 온동네 무궁화꽃처럼 피어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존재하는 것은 짜릿하다 먼지처럼 사는 일 없는.. 2023. 8. 15.
아내에게 아내에게 사진을 보내오 꽃이 다 시들고 있으니 꽃의 옛모습을 기억하시길 그대 생일이었던 8월 어느 날 슬픔은 극에 달하고 죽음 너머 숨은 빛이 가녀린 숨을 비틀고 바람은 사람들 사이를 돌다 당신 허리에 멈추었소 꽃 곁에 푸른 심장을 함께 넣어두었으니 세심히 찾길 바라오 언제나 죽음을 되새기던 사람은 그대인데 내 손에서 어둠의 흔적이 번들거리오 검은 빛이 오래동안 그대와 나 사이를 가두었오 둘이 하나가 되거나 셋으로 분열하거나 깊은 곳에 있던 사랑의 침묵은 말하고 이해하는 보통사람의 장소에서 메아리치나 보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소 당신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죽었으니 만인을 구원하였소 생일날이 축복인 것은 죽음을 예비하는 첫날이어서지만 사는 날이 모두 생일 같은 축복.. 2023. 8. 14.
듀안 마이클 <듀안 마이클(사진집)> 듀안 마이클 사진가나 화가는 자신과 모델을 가끔 동일시할 수 있다. 혹은 너무나 욕망한 나머지 모델의 욕망을 모방할 수도 있다. 모델이 작가의 분신일 수도 있다. 그 모델이 진짜 예술가이고 작업을 대신하는 것은 또 다른 나일 수 있다. 내가 하나 더 존재할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사진가의 시선만큼 모델의 수도 많고, 모델의 욕망도 여러 개이며 모델 속으로 들어가 모델이 되고자 하는 작가의 분신도 여럿일 수 있다. 어딘가 또 다른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죽은 뒤에 남아 있을 나와 세상을 떠난 나로 나뉠 수 있다. 영혼이 죽은 육체를 바라보는 장면은 사진이나 회화,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자기자신이 자신과 분리되어 다른 존재가 되는 듯한 상상. 다른 누군가가 되어서 그 존재 속으로 들어.. 2023. 8. 6.
사랑의 생일 사랑의 생일 사랑은 저만치 먼 곳에서 울고 있다 사랑이 등을 붙이고 흐느끼고 있다 내 마음 멀리 달아난 당신이 그립다 가슴팍에 묻은 볼 수 없는 얼굴이 불안하다 사랑은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 무엇이 사랑을 증언하는가 떨림과 설렘, 약간의 흥분과 말 못하는 느낌과 몇몇 감정들 부산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으스댄다 서른 몇 해 생일날 새벽어둠 구석에 당신이 누워 있다 부지불식간에 내가 죽인 시체처럼 얕게 코 고는 소리가 난다 다리를 들어 올려 허리를 깊게 넣고 심장에 뺨을 댄다 나쁜 생각을 한다 사랑을 완성하는 레퀴엠 사랑은 수천 개 세포로 쪼개진다 두려움은 늘 당신 몫이었는데 무서워하는 아이는 꿈으로 도피한다 사랑은 거기서 황홀하고 멋진 신사 같다 사랑은 미래에 나이가 들어서 삶을 긍정할 것이다 과거가 깡.. 2023. 8. 5.
대실 해밋 <몰타의 매> 대실 해밋 대실 해밋의 는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외관과 행동, 발언만 묘사하고 심리적인 묘사가 없다는 것이다. 대실 해밋은 사실적이면서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 현실감이 물씬 풍기는 대화, 탄탄하게 구성된 플롯, 정밀한 묘사를 통해 탐정 소설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느 날 탐정 샘 스페이드에게 원덜리라는 미모의 여성이 찾아와 서스비란 건달과 달아난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서스비는 호텔에 머물고 있으니 자세한 상황을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동료 탐정 아처가 서스비를 미행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겠다고 나서지만 의문의 살인을 당하고 만다. 경찰은 샘 스페이드가 아처의 부인 아이바와 불륜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샘을 범인으로 생각하고 조사를 시.. 2023.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