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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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 소리와 성스러움 ― 첼로 2 소리와 성스러움 ― 첼로 2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공연장* 아파트 단지 인근 상가 4층 관객은 서른 명쯤 검은 야마하 피아노 한 대 무대 왼쪽 귀퉁이에 처박혀 있고 천장에 바람막이를 설치한 에어컨이 달려 있다 네모반듯한 공간은 미술품 전시장 같다 무대와 객석은 바짝 붙어 있고 첼로를 앞에 둔 연주자는 정사각형 부조물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앉아 있다 오늘 연주곡목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검은 반소매를 길게 늘인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 40대 여성 연주자는 수도승의 풍모를 띤다 지나치게 심각한 표정 눈의 거의 감겨 있고, 흘러내린 앞머리가 얼굴 한쪽을 가리고 있다 그녀는 활을 몇 번 움직여 첫소리를 들어보더니 곧바로 연주를 시작한다 눈은 고요하게 감긴 채 기도처럼 울리는 악기의 몸 소리는 낮고 깊고 거.. 2022. 11. 27.
[명시 산책] 찰스 부코스키 <첫 숨에 산산조각> 첫 숨에 산산조각 남은 날들은 부족한데 이른 아침 햇살에 난간이 반짝인다. 우린 꿈에서조차 쉴 수 없을 거야. 이제 해야 할 일은 조각난 순간들을 다시 맞추는 것 생존이 승리처럼 느껴질 때 행운은 가냘프다 죽음을 향한 혈류보다 더 가냘프다. 인생은 서글픈 노래. 너무 많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너무 많은 얼굴 너무 많은 몸뚱이가 보인다. 최악은 그 얼굴들. 그것은 아무도 이해 못 할 질펀한 농담. 당신의 두개골 안에는 야만적이고 무의미한 날들뿐. 현실은 즙이 없는 오렌지. 계획도 없고 탈출구도 없고 신성함도 없고 기뻐하는 참새도 없구나. 우리의 인생이 그 무엇에 비견될 수 있으랴. 그래서 전망이 난망한 게지. 우리의 용기는 비교적 부족한 적은 없었으나 승산은 최고일 때도 요원했고 최저일 때는 철벽이었다. 최.. 2022. 11. 9.
[명시 산책] 보르헤스 <비> 비 가랑비가 내리니 갑자기 오후가 갠다. 내리다인지 내렸다인지. 분명 비는 과거에 일어나는 일이지. 빗소리를 듣는 이는 그지없는 행운이 장미라 부르는 꽃과 유채색 신기한 색조를 현현시켰던 그 시간을 회복하였네. 유리창을 눈멀게 하는 이 비가, 상실된 아라발의 지금은 가 버린 어느 정원 포도 덩굴 검붉은 알갱이에 생기를 돋우리. 젖은 오후는 내가 갈망하던 목소리, 죽지 않고 회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돌려주네. ―보르헤스 【산책】 흐렸던 하늘이 잠시 비가 내리니까 곧바로 환하게 밝아온다. 봄날 혹은 가을날 오후에 이런 현상은 자주 때론 가끔 볼 수 있다. 카페 창밖으로 혹은 거실 창을 열고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거나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옛 기억이 떠오르고 기억의 끝을 좇아 회상에 잠기곤 한다. 장미와 다.. 2022. 11. 7.
[창작시] 슬픔 1029 슬픔 1029 좁은 골목에 슬픔이 걸어들어옵니다 작은 골목에 아픔이 스며듭니다 슬픔이 쓰러져 눕습니다 다른 슬픔이 덮습니다 아픔이 누워 소리칩니다 더 크고 깊은 아픔이 덮습니다 슬픔이 함박눈처럼 쌓이고 아픔이 겹겹이 짓누릅니다 푸른 망토를 두른 호박 머리 붉디 붉은 희고 흰 청춘, 꽃들! 한 뼘의 땅에 누워서 잠들고 다시 일어서지 않습니다 꿈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미래는 과거를 향해 돌아섰습니다 슬픔에 슬픔을 아픔에 아픔을 아무 말할 수 없는 마음에 술을 붓고 기억에 불을 질러도 깨어날 수 없습니다 1029 없는 날이었으면…… 역사가 되고 만 없는 날 2022. 11. 6.
[명시 산책] 게오르크 트라클 <고독자의 가을> 고독자의 가을 어두운 가을이 가득 품고 돌아오는 열매와 풍요, 이는 누렇게 바래버린,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광채. 순결한 푸름이 퇴락한 껍데기에서 튀어나오고; 새들의 비행에서는 오래된 전설의 소리가 난다. 포도주는 이미 빚어졌으니, 부드러운 고요는 어두운 물음들에 대한 조용한 답변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외딴 언덕에 꽂혀 있는 십자가; 붉은 숲에서 양 떼 하나가 길을 잃는다. 구름은 호수의 거울을 스치며 지나가고; 농부의 차분한 몸놀림 또한 쉬고 있다. 아주 조용히 저녁의 푸른 날개가 어루만지는 메마른 초가지붕, 시커먼 흙. 머지않아 피로한 자의 눈썹에 별들이 둥지를 튼다; 서늘한 방에는 고요한 만족감이 찾아들고 천사들이 저버리는 푸른 눈들은 부드럽게 고통받는 연인들의 것.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 .. 2022. 11. 5.
[창작 시]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 잠시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 잠시 사랑이 충만해져 있을 때 가슴에서부터 목까지 차올라 숨이 가쁠 때 지옥의 종소리가 가물가물 들릴 때 그 시간 모차르트는 어디 있는가 사랑이 온몸을 지배할 때 쇼팽은 무엇을 연주하는가 키 작은 베토벤은 사랑과 무관한 척 불멸의 표정을 짓는가 사랑은 왜 입술에서 터져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차분히 가라앉는가 오케스트라가 정렬하고 지휘자가 인사를 한 뒤 가수들이 등장하면 오페라가 시작된다 몇 초 전까지도 나는 지드의 쇼팽노트를 읽고 있었다 인후염을 앓는 아내가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다 오늘밤 우리는 모차르트의 기쁨과 베토벤의 격정과 스트라우스의 3박자 강물을 체험할 것이다 사랑한 후에 쇼팽의 나른한 우울에 잠시 젖을까 토스카, 사랑은 어떻게 죽음을 선택하는가 선한 사람이 고통받을 때 .. 2022. 10. 24.
[명시 산책] 김소월 <진달래꽃> (feat. 길병민)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김정식) 1902~1934 【산책】 봄마다 산에 들에 길가에 담벼락 곁에 어느 곳 어디 사방천지에 피어나는 꽃 분홍빛 붉은 입술 발그레 달아오른 볼(뺨) 핑크―사랑(하트)의 빛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빛깔의 꽃! ★ 진달래꽃을 노래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시는 어쩌면 이별 노래가 아닌 사랑의 시가 아닐까. 이어령은 이 시가 미래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현재는 그 내용이 정반대로 읽힌다고 말했다. 문장의 시제가 미래형이든 현재형이 상관없이 소월.. 2022. 10. 13.
[창작시] 마음이라는 물질적 존재에 관하여 마음이라는 물질적 존재에 관하여 어둠은 차츰 심장을 파먹고 폐로 쑥 들었다가 나며 죽음 근처로 장기들을 옮기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장기들 사이에 숨은 마음이란 것뿐이었다 마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물질이었다 마음이 불멸하는 영혼일지 모르지만 마음은 늙고 병들고 아프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없지만, 있는 인간에게 몸이 있는 한 마음은 흔적을 남긴다 언제나 침묵하고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으며 썩고 찌들고 쪼그라들지만 진단하고 수술할 수 없다 만질 수 없는 물질 불태워 없앨 수 없는 물질 한순간 죽었다가 늘 거듭나는 물질 고결한 영혼도 천박한 감정도 아닌 사람이 살아 있으면 언제 어디든 같이 숨 쉬면서 몸이 죽어가는 시간에도 시퍼렇게 생생하게 그 몸의 시간을 증명하는 몸이 죽을 때 같이 죽어서 몸이 .. 2022. 10. 12.
[창작시] 안개 안개 새벽에 안개뿐이었습니다 두텁고 짙고 깊은 빽빽하고 촘촘히 짠 구름 속을 걷는 느낌 그날 아침엔 안개가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사람의 눈을 가리고 피부에 스며들었어요 이러다 곧 심장과 폐를 갉아먹을 듯 불안과 약간의 공포에 젖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볼 수 없는 먹먹함 그날 아침 우리는 어디를 가고 있었던 것일까요 증평에서 외박을 나온다는 사내를 기다렸던 것일까요 한참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습니다 안개가 전파를 삼켜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군에서 젊은 남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저 옛말일까요 조금 늦을 뿐 사내는 구릿빛 단단한 얼굴로 웃으며 나타날까요 안개 때문에 기대와 기다림은 발이 묶여 초조와 긴장으로 바뀝니다 종이로 빚은 결코 썩지 않고 빛이 바래지 않는 꽃다발은 희미하게 반짝거립니다 생생하던.. 2022.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