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지하 <빈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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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지하 <빈 산>

by 브린니 2021. 3. 6.

빈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파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내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김지하

 

 

 

시인은 어떤 산을 보고서 빈 산이라고 느꼈을까.

산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기에 비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에 타서 나무들이 모두 재로 변한 산일까.

산에 동굴이 많아서 산 속이 텅 빈 산일까.

산에 있는 돌을 다 캐내서 속이 비었을까.

 

산이 텅 비어 있기에 아무도 더는 오르지 못하는 산.

그런 산을 산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바람만 우는 벌거숭이 산

사람이 죽어서 묻힐 수조차 없는 산

 

 

시인은 꿈꾼다.

 

그러나 지금은 숯처럼 재처럼 땅 속 깊이 묻혀 있지만

언젠가 불꽃처럼 타오를 빈 산

푸른 솔을 가득하게 두르게 될 산을.

 

 

김지하는 우리 고유의 특유한 음률에 실어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을 애끓는 절창으로 노래하고 있다.

 

빈 산 빈 산 벌거숭이 산 빈 산 아득한 산 빈 산

길어라 고달파라 몰라라

죽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몰라라 몰라라

 

반복되는 단어들로 운율을 맞춰서 시의 리듬감뿐만 아니라 시에 생동감과 힘을 불어넣고 있다.

매우 허무한 듯한 빈 산의 이미지에 오히려 강렬한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비어 있다고 비극적인 상황을 노래하고 있지만 오히려 불끈 불끈 힘이 솟는 듯하다.

빈 산 빈 산 반복적으로 외쳐 부름으로써 산이 살아 꿈틀대고 산이 우뚝 일어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비극적이고 고난에 찬 삶이 그것을 뚫고 새롭게 솟아오르는 듯하다.

산처럼 삶이 일어서는 것이다.

 

빈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닐 정도로 텅 비어 버렸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

불타오를 수 있고, 푸르게 빛날 수 있다.

 

 

김지하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시대가 아무리 폭압에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삶이 텅 비어 버린 듯 하지만

지금은 땅 속 깊이 숨어 있는 듯한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가 시뻘건 숯으로 타오르고

푸른 소나무처럼 푸르게 산을 뒤덮을 것을 희망적으로 노래한다.

 

수십 년간 군사독재 이 땅을 잠식했지만

텅 빈 것 같던 산이 울창한 나무들로 뒤덮이듯

민주주의가 되살아나 오늘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한다.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김소월의 산유화가 떠오르는 첫 연은 우리 가락이 빛나는 시어와 만나 최고의 울림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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