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by 브린니 2021. 3. 7.

음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음악 혐오’ ; 그것이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

 

 

성 베드로의 눈물

 

우리는 극도로 상처 입은 어린아이와 같은 유성의 나체를, 우리 심연에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그 알몸을 천들로 감싸고 있다. 천은 세 종류다. 칸타타, 소나타, 시.

노래하는 것, 울리는 것, 말하는 것.

이 천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우리 몸이 내는 대부분의 소리를 타인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같이, 몇몇 음들과 그보다 오래된 탄식에서 우리의 귀를 지켜 내려 한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 자매의 노래가 결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았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노래를 듣고도 죽지 않은 유일한 인간인 그는 세이렌 자매의 노래를 이렇게 표현한다. “듣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는” 노래.

 

파스칼 키냐르는 <음악 혐오>에서도 <부테스>에서와 같이 음악 혹은 음(音), 소리에 관한 최초의 기억을 문제 삼는다. 이것은 음악 이전의 소리, 시원의 소리일 수도 있다.

 

 

베드로는 죽기까지 예수를 따르겠다고 다짐하지만 예수는 그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닭이 두 번째 울 때 자신이 예수를 3번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통곡한다.

 

두 번째 울음에서야 최초로 등장하여 세 번의 부인을 초래하는 수탉의 울음 속에는, 내면을 뒤흔드는 심연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도 결코 지울 수 없는 ‘소리’가 있다. 마틴 루터에게는 길을 가다가 만난 천둥소리가 신의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가 자신을 부르는 신의 음성으로 들렸다. 우리를 통곡하게 하는 심연의 소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

 

모든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외피를 뚫는 송곳의 성질을 지닌다. 신체, 방, 건물, 성,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뚫는다. 비물질적 성질을 가진 소리는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끝없는 수동성(비가시적인 강제된 수신)은 인간 청력의 근간이다. 내가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고 요약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눈은 눈꺼풀을 닫음으로써 보지 않을 수 있지만 귀는 그럴 수 없다.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은 그리스 뱃사공들이 있었지만 자연 상태로 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들려오는 소리를 방어할 만한 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갓난아이의 청취는 출생의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를 낼 수 있게 되기 훨씬 전인 태아의 상태에서부터 아기는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에 복종하기 시작한다. 그 노래는 태아보다 앞서 존재해 온 의미 불명의 소프라노이자, 태아의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동시에 따뜻하게 감싸 안는 소나타다.

 

소리는 소리를 막는 법을 알지 못한다. 소리는 즉각적으로 몸에 와 닿는다. 마치 나체이다 못해 피부까지 벗겨진 몸과 마주한 듯이, 소리는 육체 내부에 생생하게 도달한다. 귀여, 너의 포피는 어디 있는가?

 

만질 수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으며, 도달할 수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비의소적이며, 비실재적인 음악.

 

음악은 세이렌들의 공포스러운 부름 속에 깃든 죽음보다도 더 무에 가깝다.

청각은 신의 편재성을 경험하는 유일한 감각이다.

신들이 말씀으로 귀결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신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한다. 모든 종교 경전은 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으며 모든 신앙인들은 신의 말씀을 따른다. 사람들은 경전의 글귀를 눈으로 읽지만 신의 말씀은 귀에 생생하게 들린다. 신의 말씀, 신의 명령은 인간의 마음속에 와서 박히며 그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고, 선택하게 한다.

 

 

음악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된다. 타인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음악은 사랑의 세레나데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마법 피리와도 같이 사람들을 끌어당겨 어디론가 데려간다. 천상 혹은 지옥으로?

 

침묵은 결코 소리의 부재로 정의되지 않는다. 침묵은 귀가 소리에 가장 예민해져 있는 상태로 규정된다.

 

우리는 침묵에서도 소리를 듣는다. 침묵이 표현해내는 것이 마음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오래 전에 들었던 노래이거나 오랜 세월 묵은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 큰소리로 외칠 때보다 소곤거릴 때 귀를 더 기울이곤 한다.

 

가수가 노래를 할 때 어느 순간 음을 길게 빼고 난 뒤 잠시 동안 휴지기를 가질 때, 그때 청중들은 곧이어 터져 나올 애절한 외침을 간절하게 기다린다.

 

페르마타는 쉼, 늘임, 정지를 뜻한다. 페르마타의 순간 우리는 숨을 멈추고 음악에 더 집중한다. 연주와 연주 사이의 짧은 침묵은 우리의 귀를 가장 예민하게 자극한다. 어쩌면 침묵은 더 깊은 음악의 심연일 수도 있다.

 

 

소리와 밤의 유대에 대하여

 

음악과 변성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여성은 소프라노로 나고 죽는다. 결코 파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목소리는 하나의 절대적 세계다. 남성은 유년의 목소리를 잃는다. 열세 살이 되면 목이 쉰다. (……) 그들은 두 개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중이다.

 

어떤 남성들은 고환을 잘라 변성 과정을 제거해 버린다. 영원히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남는 것이다. 이것이 카스트라토다.

 

영화 ‘파리넬리’는 카스트라토의 음악을 다룬 영화다. 여성 못지않은, 여성 이상의 고음을 내지르는 카스트라토의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잃는다. 아마도 시원의 소리, 혹은 세이렌들의 괴성처럼 들리는지도 모른다.

 

현대의 카운터 테너들은 가성을 써서 여성의 소프라노 음색을 내기도 한다. 팬텀싱어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최성훈은 독특한 음색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키냐르는 작곡가들이 망가진 목소리 대신 곡을 지어서 변치 않을 확고부동한 음향적 영토를 세우고 있으며, 비르투오소라고 불리는 연주가들은 신체적 장애를 악기를 이용해 극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르투오소 virtuoso

이탈리아어로 '덕이 있는'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17세기부터 특별히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는 학자나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음악가들에게 사용되었고, 현재는 주로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거장 음악가들에게 사용된다.

 

 

세이렌의 노래

 

키냐르는 시원의 소리를 찾아내어 복원해보려는 생각이 짙은 것 같다. 그는 세이렌의 노래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면서 정제된 음악 이전의 소리를 탐구한다.

 

세이렌은 새의 모습을 하고 인간을 유혹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미끼새들을 이용해서 거짓 노랫소리로 새들을 사냥했던 것에 대한 반격이라고 키냐르는 주장한다. 새들은 자기들의 노래에 속아서 죽었는데 세이렌의 노래는 미끼에 대한 새들의 복수인 것이다.

 

구석기 시대 수렵인들은 짐승들의 울음을 흉내 내는 방식으로 사냥감을 유인했으며, 짐승들과 자신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둠에 둘러싸인 동굴 내벽에 순록이나 야생 염소의 뿔을 그려 넣었다. (……) 뿔이란 소리를 내기 위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음악은 인간 종 고유의 울음이 아니다. 인간 공동체의 특징적인 울음은 그 공동체가 가진 언어이다. 음악은 인간이 제 먹이에게서 배운 것으로 짐승들이 번식기에 내는 소리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자연의 음악회. 음악은 소처럼 울게 한다. 음악은 당나귀처럼 울게 한다. 음악은 코끼리처럼 울게 한다.

음악은 말처럼 운다.

 

음악은 샤먼의 뱃속에서 부재하는 짐승을 이끌어낸다. 샤먼은 몸으로 짐승의 몸짓을 흉내 내고, 피부와 가면을 통해 그 모습을 보여 준다.

1)음악은 음악이 발생하는 곳으로 불러들여 2)신체 리듬을 춤추도록 강요하고 3)환각의 원 안에서 땅바닥으로 쓰러져 나뒹굴게 하며, 샤먼의 몸 안에서 노호하는 소 울음소리를 내게 한다.

 

이렇게 키냐르는 원시의 소리를 따라가면서 인간의 음악이 짐승들과 어울려 살았던 시원에서 발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음악 혐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처형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키냐르는 ‘음악 혐오’라는 장에서 잘못 이용된 음악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음악의 속성 그 자체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용당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 정치 선전의 도구로, 학살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인 음악이 인간을 죽이는 일에 가장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음악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최초의 악기를 발명한 이래로 지구라는 공간 전체에서 음악의 사용은 강력한 호소력을 발하는 동시에 혐오감을 유발하는 것이 되었다. 전기의 발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무한히 확대된 음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한다.

 

음악은 도심의 상점가에서도, 쇼핑센터에서도, 파사주에서도, 백화점이나 서점에서도, 은행의 현금 인출소에서도, 수영장이나 해변, 개인 빌라, 식당, 택시, 지하철, 공항에서도 흘러나온다.

 

심지어 이착륙하는 비행기 안에도 음악이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도.

 

‘음악 혐오’라는 표현은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이에게, 그것이 얼마나 증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음악은 인간의 육체를 제 쪽으로 유인한다.

오디세우스는 제 배의 돛대에 묶여 그를 유혹하는 음악에 포위당했다. 음악은 영혼을 붙잡아 죽음으로 이끄는 낚시 바늘이다.

이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을 일으켜야 했던 수감자(수용소의 유대인)들의 고통이었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음악에 맞춰 눈을 뜨고, 음악에 맞춰 걸어가고, 밥을 먹고, 노동을 하고, 잠을 잤다. 나치 군대가 행진곡에 맞춰 진군하는 모습이 가공할 만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듯이 음악에 맞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수감자들의 모습 또한 끔찍한 공포가 아닐 수 없다. 같은 공포라고 하더라도 후자의 공포는 토할 것 같은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수감자들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동원된 음악 때문일 것이다.

 

청취와 복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휘자와 연주자와 복종자. 이것이 음악이 연주되는 즉시 성립하는 구조이다.

독일군이 죽음의 수용소에 음악을 편성한 것은 (……)

1)복종을 강요하고, 음악이 야기하는 몰개성적이고 비개별적인 융합 안에서 모두를 결속시키기 위함이다.

2) 그것은 즐거움을 위한 것인데, 이 미학적 즐거움과 가학적 쾌락은 좋아하는 가곡을 듣거나, 한때 자신들에게 모욕을 주었던 사람들이 추는 굴욕적인 발레를 보았을 때 느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의례적 특성을 지닌 음악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음악이 ‘저주’ 같다도 적었다. 음악은 “생각을 없애고, 고통을 완화하는, 끊임없는 리듬의 최면 상태”였다.

 

음악은 나치스 친위대의 호각 소리로 이미 사방에 자리하고 있다. 음악은 효과적인 지배력을 발휘하여 즉각적인 태도를 유발한다. 마치 수용소의 종이 기상을 알리듯이. 그 종소리로 꿈속 악몽이 그치고 현실의 악몽이 시작되듯이. 소리는 매 순간 “일어서게” 한다.

음악의 감추어진 기능은 소환이다.

 

알람의 멜로디가 잠을 깨우듯 수용소의 모든 이들이 음악 때문에 일어나고 움직였다. 음악의 마리오네뜨처럼. 음악은 누군가를 자꾸 부른다. 소환장을 받은 사람은 법원에 출석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을 통해 소환당한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죽음이 부르는 소환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주를 풀다

 

음악이 드문 것이었을 때, 음악의 소환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정신을 어지럽히는 유혹 같은 것이었다.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게 되자 그것은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침묵이 모두가 부르짖는 장엄한 것의 자리에 놓였다.

 

키냐르는 음악이 유대인 학살에 이용된 것뿐만 아니라 음악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들려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정말 이 시대에는 어느 곳에서나 음악이 들려온다. 집안을 제외하고는 밖에서 듣는 음악의 대부분은 선전용 음악이다.

 

상가에서는 고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음악을 높은 볼륨으로 튼다. 카페나 상점 안에서는 고객들을 만족시키고 안락함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음악을 튼다. 이러한 음악 모두에는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다. 귀는 쉴 틈이 없고, 자극받는다. 그래서 한 순간 침묵이 오면 그것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해지기도 한다. 한 번도 뭔가 들려오지 않은 적이 없기에.

 

 

인간은 더는 자연이 내는 소리에 육체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대신 전기로 재생되는 유럽의 향수 어린 멜로디에 사회적으로 복종한다.

 

침묵은 근대에 들어 현기증을 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거대 도시에서 이례적인 사치품이 된 것이다.

자기를 희생한 음악은 그 후로 미끼새처럼 침묵을 끌어당긴다.

 

무한히 증식된 음악은 (……) 유일성을 상실하며 음악은 그 실재와도 멀어졌다. 음악의 증식은 음악의 출현에서 그 실재를 제거해 버렸다. 음악의 발생에서 본질을 없애는 이러한 행위는 음악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

 

키냐르는 무한 반복되는 음악이 본래의 유일성을 잃은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계에 편재한 음악으로부터 탈주를 꿈꾼다.

 

나는 피할 길 없는 음악에서 도망친다.

 

키냐르는 만들어지고 반복 재생되는 음악보다는 자연의 소리를 지닌 유일한 소리(설령 그것이 규칙에 맞는 음악이 아니라 하더라도)을 찾고, 들추어내고, 그것을 향유하고 싶은 욕망을 글을 통해 말하고 있다.

 

옛집이 소나타를 연주한다. 몇 대가 그곳을 거쳤는지 알지 못한 채로, 대대로 이어지는 거주자들의 기억을 느릿느릿 가로지른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린다. 덧창이 덜컹거린다. 계단마다 제 음이 있다. 장롱 문짝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고, 오래된 긴 가죽 소파 용수철이 화답한다. 여름의 건조함이 나무를 바싹 마르게 할 때면, 집안의 모든 나무들이 규칙적이면서도 무질서한 소리를 내는 하나의 악기가 된다. 악기의 연주가 너무도 더뎌 설령 그곳에서 거주하는 인간들의 귀에는 온전히 감지되지 않을지라도, 악기는 파괴될수록 위력을 발휘하는 쇠락이란 이름의 작품을 연주한다.

 

옛집은 신성과 무관한 노래를 부른다. 인간은 제 음계 안에서 자라고 죽음을 맞이한다.

새벽녘이나 한밤중에, 이미 알고 있던 그 음계 위에 제 울음을 덧대고 또 덧댄다. 옛집의 노래는 인간의 음계와도 무관하다. 그것은 느린 서사적 노래다. 여러 세대의 결집체처럼 보이는 가족에게 건네는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이 노래의 그 어떤 한시적 요소도,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원자들도 진실로 알 수는 없다. 노래는 예견된 폐허 위에서 끝없이 삐거덕거리며 이어진다.

 

위의 구절은 문학으로 복원된 음악이라 할 만큼 아름답다. 자연이 내는 소리 그 자체가 음악으로 바뀐다. 어쩌면 이것은 이 시대에는 가능한 음악의 형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키냐르는 음악이 원시성을 회복하고, 유일성을 되찾고, 인간에게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맛을 함께 느끼는 것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음악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쓴 글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키냐르는 자신의 글을 통해 끊임없이 음악이 잃어버린 것들, 그러나 음악 속에 있는 것들을 다시 발견해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음악 속에서 음악의 본질을 꺼내서 함께 향유하기를 욕망하고 있다.

 

키냐르의 말처럼

 

내가 잃어버린 것은 내 안에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인생 전반에도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음악이 음악 속에서 음악을 찾듯이 우리도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키냐르는 음악 집안에서 태어난 연주자이면서 작가이다. 그러나 음악보다는 글과 책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뼛속까지 음악인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거의 대부분 음악과 연관되어 있다. 그의 인생은 음악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은둔하는 삶을 통해 음악의 침묵을 스스로 구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책을 발표함으로써 일종의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음악이 잃어버린 시원을 드러내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