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조용미 <봄,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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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조용미 <봄, 심연>

by 브린니 2021. 3. 14.

봄, 심연

 

 

회천 청매 보러 갔다 구불구불 먼 길 긴 메타세퀴이아 길 만났다 녹차밭 지났다 삐뚜름한 오층석탑 한 그루와 부딪혔다

 

율어, 겸백, 사람 이름 같은 지명들 통과했다

 

무섭도록 큰 팽나무들이 마을 입구에 줄지어 서 있다

 

녹색빛 도는 매화 한 그루 아래 들어 가만 숨 고르며 서 있었다

귀신 같은 매화나무와 뺨이 야윈 내가 함께 있었다

 

건너편에서 찢어진 검은 비닐이 나무가 피워 올린 기이한 꽃처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매화 옆 빈 밭에 보랏빛 자운영이 미열처럼 깔려 있었다 어지러웠다

 

붉고, 푸르고, 희고, 검은 봄에 나는 항상 먼저 도착했다

 

―조용미

 

 

【산책】

 

봄이 왔다.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사는 날들이 많았다.

 

바쁘다는 건 늘 핑계였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혹은 시린 겨울날이 계속 되었거나

 

그랬다.

봄이 오는 건 삽시간이서 잘 모르고 있다가

반가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처럼.

 

꽃이 핀 줄도 몰랐다.

꽃은 봄에만 피는 것은 아니지만

꽃이 피면 봄이 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꽃 때!

아직 꽃이 무분별하게 피어나지 않았으나

꽃망울 틔운 꽃들이 눈에 띈다.

 

산수유, 매화……

겨울의 빈 틈을 열고 누구보다 빠르게 얼굴을 내민 꽃들.

 

그러나 꽃보다 먼저 봄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

 

 

붉고, 푸르고, 희고, 검은 봄에 나는 항상 먼저 도착했다

 

꽃보다 먼저 봄에 도착하는 사람은 시인이었다.

꽃보다 먼저 봄을 노래하는 것은 시였다.

 

 

녹색빛 도는 매화 한 그루 아래 들어 가만 숨 고르며 서 있었다

귀신 같은 매화나무와 뺨이 야윈 내가 함께 있었다

 

청매화를 보러 도시를 떠나 길에서 봄을 느끼며

매화나무 아래 섰다.

 

숨을 고르며 고요하게 나무 아래 서 있으면

청매화는 귀신 같다.

어느 죽은 혼이 되살아나는 것일까.

 

매화 옆 빈 밭에 보랏빛 자운영이 미열처럼 깔려 있었다 어지러웠다

 

녹색빛 도는 매화 옆에 보랏빛 자운영이 피어 있다

바람이 없는데 꽃들이 흔들리는 것인지 사람이 흔들리는 것인지

머리가 어질하다.

 

이른 봄이어서 겨울이 아직 시샘하는 것일까

몸에서 미열이 난다.

 

 

붉고, 푸르고, 희고, 검은 봄

 

봄의 색깔이 왜 붉고, 푸르고, 희고, 검을까.

 

꽃이 붉고,

나무가 푸르고,

흰 새가 날고,

 

그런데 검은 것은?

 

머리 검은 짐승―인간!

봄의 한복판에 선 사람은 누구인가.

 

 

감성이 가장 예민한 시인이 항상 봄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겨울의 동면에서 깨어난 꽃과 나무들이 시인을 반긴다.

 

시인은 꽃들의 환호에 어질하다.

꽃은 혼을 다 빼놓는 귀신 같다.

 

귀신이 뺨이 야윈 시인의 얼굴 어루만지며

검은 심연으로 데리고 간다.

 

시인의 고요한 숨결에서 시가 새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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