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빌라 아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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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파스칼 키냐르 <빌라 아말리아>

by 브린니 2021. 3. 15.

음악과 사랑과 죽음의 멜로드라마 : 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빌라 아말리아>는 키냐르의 소설 가운데 드물게 스토리가 분명한 소설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음악가 안 이덴은 동거하던 애인 토마의 뒤를 밟아 젊은 여자를 만나는 현장을 목격하는 순간 어릴 적 소꿉친구인 조르주를 만난다.

 

안 이덴은 그날 토마와 헤어질 것을 결심한다.

 

조르주에게 부탁해서 조르주의 명의로 자신의 통장을 관리해주고, 새 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안 이덴은 토마와 살던 그녀 명의로 된 집을 처분하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안 이덴은 나폴리 해변의 섬으로 여행을 떠나 홀로 지낸다.

 

안 이덴은 빌라 아말리아를 발견하고 너무 행복해하면서 그 집에 세든다.

 

섬에서 의사 레온하르트를 만나 관능적인 우정을 나눈다.

 

그 사이 어머니가 죽고, 수십 년 만에 사라졌던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연주를 하고 다시 이별한다.

 

의사 레오에게 세 살짜리 딸 레나가 있었는데 안 이덴은 그 딸에게 애정을 느끼며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을 하다 발에 쥐가 나는 바람에 거의 죽을 뻔한 것을 요트를 타고 지나가던 샤를과 줄리아가 발견하고 구한다.

 

줄리아는 첫눈에 안 이덴에게 반하고, 두 여자는 동성간의 사랑을 나눈다.

안 이덴과 줄리아, 그리고 어린 레나는 삼각형처럼 붙어 다니며 남자가 없는 세상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음식을 잘못 먹고 숨이 막힌 레나가 갑자기 죽자 줄리아는 떠나고 만다.

 

안 이덴은 조르주와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병에 걸려 거의 죽어가는 조르주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육체적 사랑이 아닌 어린 시절 친구들이 서로를 보살피는 사랑이다.

 

조르주가 죽고, 안 이덴 역시 늙어간다.

 

 

1부

 

‘안’이 조르주를 만나 그의 어머니 집으로 들어가 추억을 나눈다. 안은 조르주의 집에 드나들며 그의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먹곤 했었다. 그의 어머니는 열흘 전쯤 세상을 떠났다. <빌라 아말리아>는 조르주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조르주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주인공은 아니지만 소설의 문을 열고 닫는다. ‘죽음’이 소설의 문을 열고 닫다니!

 

안은 토마의 불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근처 호텔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진다.

 

울고 싶은 욕망이 멈추자 고통은 한결 심해졌다.

 

헤어지자는 안의 말에 토마는 말한다.

 

“안, 사랑해.”

 

안이 대답한다.

 

“거짓이야.”

 

사랑과 거짓은 함께 갈 수 없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란 영화가 있다.

거짓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사랑은 투명하다!

거짓을 말하는 순간 사랑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때부터 안은 토마로부터 탈주한다. 토마와 살던 집으로부터, 자기 인생으로부터. 아니, 누군가와 함께 했던 인생으로부터. 안은 어떤 인생이 없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안은 집을 정리하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택했다. 토마는 안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한 채 강제로 이별을 당한다. 안은 토마가 자신을 속였듯 그를 완전히 속인다. 토마가 런던으로 출장을 간 사이 안은 없어진다. 토마는 두 달쯤 뒤 자신의 사무실로 배달된 옷가지 몇을 받을 뿐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도어가 완전히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안이 토마 몰래 사라지는 장면을 묘사한 소설의 수십 쪽은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흥미진진하다. <오션스 일레븐>이나 <이탈리안 잡>에서처럼 마지막 한 번을 속이기 위해 준비하는 장면들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처럼.

 

안은 집을 떠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이젠 나에겐 가정이 없는 거로구나.’

가정(우리의 잘못이 용서받고, 우리의 결함이 용납되는 장소)은 정원 한가운데서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버리고 스포츠 복장을 샀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금발로 염색한 다음 새하얀 브리지를 넣었다.

 

거울 속의 그녀는 정말로 얼이 빠진 듯했다. 늙은 여자.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으로 부당하게 벌을 받은 여자였다. 이제 그녀 자신의 자취는 사라지고 없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녀와 연결될 수도 합류할 수도 없었다.

 

안은 스위스 국경을 지났다.

 

첫 번째 호수가 나타나자, 행복해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눈을 뜬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떤 것이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리라는 느낌이 든다.”

 

 

2부

 

이탈리아 여행 중 나폴리 연안 섬에서 안 이덴은 해변의 절벽 위에 선 빌라를 발견했다.

 

암석 안에 안전하게 자리 잡은 빌라는 바다 전체를 굽어보고 있었다. 테라스에서의 조망은 무한했다. 전경 안쪽에 카프리 섬과 소렌토의 곶. 그리고 아득히 펼쳐진 바다. 그녀는 바라보는 즉시 몸이 얼어붙었다. 그것은 풍경이 아니라 누군가였다. 사람은 아니고, 물론 신도 아니고, 한 존재였다.

 

특이한 시선.

어떤 사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구체적인 얼굴.

 

그녀는 남동쪽 바다를 굽어보는 길고, 좁고,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집의 소유자를 알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모든 사랑에는 매혹하는 무엇이 있다. (……) 그녀에게 오라고 부르는 집이었다. 그녀는 그것에 살고 싶었다.

 

그리고 안은 빌라 아말리아에 세를 들었다.

 

 

안은 어머니를 보러 고향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토마와 헤어지고 여행 중인 딸을 걱정했다.

 

“중요한 건, 엄마.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거야.”

 

안의 말에 어머니는 말했다.

 

“아무도 저 자신을 이해할 순 없단다, 엘리안.”

 

 

이 소설의 배경에는 음악이 깔려 있다. 주인공 안 이덴은 작곡가이자 연주자이다. 그녀의 아버지도 음악가였다. 그녀는 음악을 처음 만났던 때를 이렇게 추억한다.

 

“내면의 세계가 그렇게 내 안에서 열렸던 거예요. 어렴풋이 열리자 육체는 지상을 추월해서 벗어나는, 외부 공간을 떠나는 버릇을 지니게 되었지요.”

 

그녀는 의사 레온하르트 라드니츠키를 만나 연인과 같은 깊은 우정 나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딸 레나에게서도 연대감을 느낀다.

 

안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에는 삶을 불행하게 만든 수동적 고집의 본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삶을 불행하게 만든 수동적 고집의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적극적으로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지 못하지만 운명 혹은 어떤 힘에 의해 삶이 움직이는 것을 거부하는 바람에 오히려 불행을 자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올바른 선택을 했음에도 그것 때문에 삶이 불행해지는 그런 것. 비록 그녀가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을지도 삶은 결과적으로 불행하게 되는 그런 식의 수동적인 방식.

 

 

3부

 

안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다리에 쥐가 나 죽을 뻔했다.

그때 샤를 슈노뉴와 줄리아를 만나 구출받는다.

 

그 뒤로 줄리아와 연인 관계가 된다.

 

줄리아는 레나를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아이가 땅콩에 기도가 막혀 세 살 나이에 사망했다.

줄리아는 충격을 받아 안을 떠났다.

 

장례식 후에 안은 레온하르트 라드니츠키와도 결별하고, 빌라 아말리아도 떠나게 된다.

 

사건이 자신의 시련으로 축소되자, 어떤 우리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어떤 알코올도 마약도, 커피도, 담배도, 화학약품도, 수면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혼이 고통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말하자면 영혼이 고통을 마주 보며 감내하고, 자신의 시간을, 심연을, 비탄을 고통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고통을 육체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고통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먹이로 주어야 한다. 마치 고통이 하나의 존재인 듯이. 그를 유혹하고, 그에게 미끼를 던지고, 뭔가를 제물을 바쳐야 한다.

 

안 이덴은 바닷가의 빌라를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안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줄리아, 레오. 안은 자신의 고통을 육체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고통에게 제물을 바친다. 바로 자신이 사랑하던 존재, 빌라 아말리아를.

 

아말리아는 새로운 자신이 찾은 자신만의 장소였으나 그것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그녀는 다시 반쯤은 예전의 삶과 연관된 곳으로 돌아온다. 수동적 고집의 본성이 그를 불행쪽으로 잡아당긴 것인지도 모른다.

 

안은 어머니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장례식을 위해 고향집으로 온다. 장례식에서 헤어진 토마와도 만나고,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만난다.

 

 

4부

 

안은 아버지를 만나서 그가 항상 도망치는 존재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자신 역시 내내 달아나왔다고 느낀다. 미국의 아버지의 집에서 안은 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합동 연주를 한다.

 

안은 조르주와 함께 미리 사둔 집으로 온다. 그와 결혼하지만 그 역시 불치병에 걸려 있는 상태였고, 곧 죽음을 맞이한다.

 

안 역시 늙어간다.

 

 

빌라 아말리아는 안 이덴이라는 음악가를 통해 음악과 인생에 대해 말한다. 음악이란 인생의 심연에서 건져올리는 어둠처럼 음악가의 인생과 바꾸는 무엇이다. 그래서 음악가에게 음악과 인생을 따로 구분해서 말할 수 없다.

 

안 이덴은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만 음악으로부터는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인생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음악가로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것이 삶의 불행을 상쇄하지 못하고, 동시에 음악은 인생의 불행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유일한 무엇이다.

 

빌라 아말리아는 음악도 아니고 인생도 아니지만 또 다른 존재로서 그녀에게 다가 온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느끼는 순간, 불행은 다시 그녀를 인생의 한복판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녀는 고통을 너무 견디기 힘들어 빌라 아말리아를 제물로 바치고 만다. 자기의 존재가 다시 시작되는 장소는 그렇게 사라지고 그녀는 단절되었던 자신의 옛 인생과 조우한다.

 

그것은 몇 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이루어진다. 레나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조르주의 죽음. 이 소설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일깨우려는 것일까.

 

인생은 사랑하면서 살다가 죽는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고통 가운데 허우적대다가 죽는다.

 

그때 음악은 인생을 위로 하고, 애도할 뿐이다.

 

음악은 인생보다 더 깊은 심연에서 울리고 있다.

어쩌면 죽음 깊숙이에서 들려오는지도 모른다.

 

영화 빌라 아말리아

브누와 작코 (감독),장 위그 앙글라드,이자벨 위페르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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