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신해욱 <천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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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신해욱 <천변에서>

by 브린니 2021. 3. 30.

천변에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김소월 「개여울」

 

 

이쪽을 매정히 등지고

검은 머리가 천변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산발입니다

 

죽은 생각을 물에 개어

경단을 빚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

작고

가차 없는 것들

 

차갑고

말랑말랑하고

당돌한 것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핏가루 콩가루

빵가루

뇌하수체 가루

알록달록한 고물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나눠 먹읍시다!

 

나눠 먹읍시다 메아리도 울리는데

 

검은 머리는 뒤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검은 머리만 어깨 너머로 흘러내립니다

이크, 몇 오라기가

경단에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쟁반을 몰래 내려놓고

머리를 땋아주는 일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가 삼손의 백발이 될 때까지

백발마녀가 라푼젤로 환생할 때까지

 

그다음엔

그다음엔 꼭 나눠 먹읍시다

 

어제의 네가

오늘을 차지하고 있어서

오늘의 나는

이렇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해욱

 

 

【산책】

 

죽었거나 망각했거나, 아무튼 과거의 나는

레테의 강이거나 스틱스 강이거나, 아케론 강기슭에서

머리를 풀고 앉아 있다.

 

(대성통곡을 하며 과거를 탓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죽은 생각으로 경단을 빚고 있다.

 

죽은 생각이란

죽은 사람의 생각이라 것일까?

 

아니면 죽은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생각을 해봐야 이미 다 죽은 것이라는 뜻일까?

 

죽은 생각으로 경단을 빚어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

 

나눠먹자고 기다리는데

나눠먹지도 못하고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

 

검은 머리가 삼손의 백발이 될 때까지

백발마녀가 라푼젤로 환생할 때까지

 

신화나 성경이나 동화에 나오는

아주 오래된 머리칼에 관한 이야기

 

머리를 풀고 있는 너는

석고대죄를 청하는 것인가?

 

무슨 죄를 지었고, 어떤 벌을 구하는가?

용서를 원하는가, 심판을 기다리는가.

 

죽은 생각으로 빚은 경단을 나눠 먹지는 못하고,

그저 강기슭에 앉아 있다.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와

등을 진 채

미래를 기다리면서.

 

그 오래된 미래에선 너와 내가 화해할 수 있을까.

 

과거가 강에 씻겨 내려가 미래에 닿을 수 있을까.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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