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장수진 <두시의 신비로운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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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장수진 <두시의 신비로운 능력>

by 브린니 2021. 1. 30.

두시의 신비로운 능력

 

 

회색 두부에

 

꼿꼿한 혀 한 장 박혀 있다

 

부러진 커터 칼날처럼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푸른 베일을 쓴 채

 

한쪽 발로

 

초승달의 목을 밟고 있다, 파르르

 

파르르

 

달은 숨이 할딱거린다

 

파랗게 점점 파랗게 미미한 파도처럼

 

살짝

 

살짝 치 떨던 달은

 

차갑게 식는다

 

모든 낭만의 밤은 끝났다

 

고양이의 작은 발 주먹 아래서

 

두시의 등 뒤로 가끔 해변이 열리고

 

닫히고

 

누군가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 없는 밤이 지속되었다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버려진 괘종시계에서

 

두 시를 물어뜯었다

 

아무도 모른다

 

두 시가 없는 시계

 

두 시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끝나지 않는 라디오를

 

영원히 들으며

 

오래된 영화 음악 속에서

 

어쩌면 이 세계에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두 시의 연인

 

두 시의 오해

 

두 시의 자살

 

같은 것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두 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두시 속에서

 

지겹게 곰팡이를 피우며

 

착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갈

 

두 시의 파국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장수진

 

 

【산책】

 

오후 두 시를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새벽 두 시?

 

어정쩡한 시간

 

밥을 먹고 약간 졸리는, 나른해져오는 그러나 아직 배부른

오후 두 시

 

잠들기엔 아직 고민거리가 남은 시간,

깨어있기엔 새벽이 아직 먼 시간

새벽 두 시

 

고양이는 잠들어 있을까.

낮잠이거나

혹은 깊은 밤의 꿈 속.

 

고양이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흰 두부에 혀를 빠뜨리는 어리석은 바보는

감옥에라도 다녀온 것일까.

 

 

혀가 없어도 고양이는 사물을 물어뜯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맛을 느낄 수는 없다.

혀가 없어도 고양이는 울 수 있을까.

추가 없어도 괘종시계는 울 수 있을까.

고양이가 물어뜯은 것은 시계일까.

시간일까.

흘러가는 시간을 물어뜯어서 멈춰 세울 수 있을까.

 

 

두 시가 없는 시계

두 시가 사라진 세계에서

두 시를 건너뛰고 어디로 넘어갈 수 있을까.

 

두 시가 없는 3시.

두 시가 지워진 15시.

 

 

라디오에서 2시의 데이트라는 음악방송이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거기엔 두 시의 연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두 시의 오해도 있었을 테고

어쩌면 두 시의 자살도 발생했을 수도 있다.

과거나 추억 같은 것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다.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푸른 베일을 쓴 채

한쪽 발로

초승달의 목을 밟고 있다, 파르르

파르르 달은 숨이 할딱거린다

파랗게 점점 파랗게 미미한 파도처럼

살짝

살짝 치 떨던 달은

차갑게 식는다

모든 낭만의 밤은 끝났다

 

 

보름달이 뜨는 밤은 밝다. 그러나 위험하다.

초승달은, 눈에서 떨어져 나간 눈썹 같은 초승달은 창백하다.

 

고양이가 달을 밟아서 죽이듯

연인들이 죽어나간다. 목을 맨다.

 

낭만이라는 말은 떠난 사랑과 함께 차갑게 식는다.

 

 

고양이의 작은 발 주먹 아래서

두시의 등 뒤로 가끔 해변이 열리고

닫히고

누군가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 없는 밤이 지속되었다

 

 

젊어서 죽은 가수의 노래를 십수 년 뒤에 다시 들어보면

슬픔이 자꾸 기어 올라온다.

 

유명해서 잘 따라 불렀던 노래보다

귓가엔 익숙하지만 입술에만 맴돌던

 

두 번째, 세 번째 노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슬픔은 거듭 거듭된다.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해변에는 사람이 서 있고,

해변을 거니는 사람이, 혹은 단 한 사람이……

 

해변이 닫히는 것은

세계에서 두 시가 사라져서일까.

 

 

거짓말 없는 밤에서는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뒹굴고 있을까.

차라리 달콤한 거짓말이 그리울 테지.

 

진실처럼 아픈 게 또 어딨니.

 

 

착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갈

두 시의 파국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불행은 언제나 한꺼번에 밀려들고,

착한 사람들은 무더기로 죽는다.

불행한 착한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파국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두 시는 사라졌다.

 

 

시간의 빈 틈 속으로

착한 사람들이여,

숨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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