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조용미 <비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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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조용미 <비가역>

by 브린니 2021. 1. 25.

비가역

 

 

  창밖으로 자동차 소음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낯선 곳에서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잘 읽히지 않는 이 책의 한 페이지에서 여러 번 책장을 덮었다 다시 펼칠 때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들길을 걷다 노랑꽃창포와 골풀이 피어 있는 습지를 만나고 거기서 고라니가 뛰어나오는데 당신을 떠올릴 겨를이 없다

  어떤 깊고 얕은 풍경 앞에서도 나는 당신을 떠올리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온전히 다 나의 것이었다니

  이제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으니 당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한가함이 더해진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자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일과는 또 다른 새로움이 생겨난다

 

―조용미

 

 

【산책】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한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처럼 가슴 아픈 게 또 있을까.

 

떠난 사람이 잊혀지지 않고 매일 매일 떠올라 가슴이 미어진다.

울다 울다 정신을 차려보지만 눈물에 어리는 것도 그 사람이다.

 

그러다 떠난 사람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 날이 있다.

아, 이제 잊혀진 것인가.

 

그러나 다시 마음이 미어져 죽을 것 같다.

내가 그 사람을 잊다니.

 

그 사람을 쉬 잊을 만큼 나의 사랑이 이토록 빈약한 것이었나.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정말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것일까.

 

당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당신은 생각을 지배한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당신이 나의 생각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당신에 대한 소소한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뿐이지 당신의 존재에 대해 잊었다는 게 결코 아니다.

당신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다.

 

당신은 그림자와 같다.

굳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내게 딱 들러붙어 있는 그것!

 

 

  당신을 생각하지 않자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일과는 또 다른 새로움이 생겨난다

 

당신에 대해 시시콜콜 생각하지 않으니까

생각에 빈틈이 생긴다. 생각에 빈 공간이 넓어진다.

 

생각이 멈춘 뒤 거기에 다른 시간들이 새롭게 생겨난다.

 

당신을 대체하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일까.

당신을 생각하는 대신, 생각하는 일을 중지하고, 완전히 다른 일에 매진하는 것일까.

 

당신 대신에 새롭게 마주하는 다른 어떤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을 잃고 나는 무엇을 얻는가?

 

비가, 슬픈 노래.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나는 과연 어떤 감정 상태일까.

어쩌면 우울에 깊이 빠져 있는 게 아닐까.

 

당신이 없는 빈 시간과 빈 공간 속에서 나는 살아 있는 것일까.

 

아주 한가롭게……

삶이 없는 텅 빈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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