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조용미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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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조용미 <시인의 말>

by 브린니 2021. 1. 8.

시인의 말

 

 

바람 아래를 바라보며

바람 위에 서 있다

 

과거가 아닌 현재가

심연이다

 

2020년 3월

조용미

 

【산책】

 

시가 아니라 시인의 말이다.

사실 작품이 아닌 저자의 말 등은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조용미 시인의 최근 시집 『당신의 아름다움』의 맨 앞에 실린 시인의 말은 시 같아서 좋다.

 

바람 아래를 바라보며

바람 위에 서 있다

 

바람의 아래는 어디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바람이라고 부를까.

 

바람의 두께는?

바람의 부피는?

 

바람 위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구름을 타는 손오공이 있지만 바람을 타는 시인?

 

바람 위에서 바람 아래를 바라보면 어떤 기분일까? 어떤 느낌일까?

아래와 위를 나누는 바람은 정말 어떤 모습일까?

 

바람이 부는 걸 알지만 바람을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바람의 위와 아래를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바람을 사이에 두고 위와 아래로 나누어진 세계는 또 어떤 모습일까?

바람을 이야기한 시는 많이 있겠지만 바람을 위아래로 나눈 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바람 위에서 아래는 바라보는 느낌은?

아마도 자신의 심연을 바라보는 느낌인가보다.

 

과거가 아닌 현재가

심연이다

 

대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서 심연을 트라우마와 관련짓기도 하고,

어린시절의 기억과 연관해서 말한다.

 

심연이란,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렁이다.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뜻을 풀이한다.

1 깊은 못.

2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구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간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영어 abyss는 깊은 구멍이다.

An abyss is a very deep hole in the ground.

 

우리는 “심연을 들여다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사실 심연을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심연이란 끝을 알 수 없는 구멍이기 때문이다.

바닥이 없기에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사람은 현재의 괴로움 때문에 과거를 돌아본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따져 묻는다.

 

그런데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정말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될까?

 

시인은 말한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심연이라고.

 

말인즉슨 심연은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알 수 없다. 흔히 부질없다고 말한다.

 

현재를 제대로 만들고 싶어서 과거를 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기에

현재를 더 알 수 없고,

현재가 더 깊은 구렁처럼 빠져들기만 하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다시 한 번 인생 부질없다는 느낌이 든다.

시인은 왜 바람과 심연을 연결했을까.

 

그것은 모두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은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있다.

심연도 그렇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마음 어딘가에 있다는 데 거기가 어디인가?)

 

그런데 심연이 있기는 있다.

다만 구멍으로 존재한다.

 

도넛을 다 먹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구멍이 남는다.

도넛은 구멍과 도넛(빵)으로 구성되었으니까.

 

심연도 구멍뿐이지만 존재한다.

바람처럼 보이지도 잡을 수 없지만.

 

그래서 신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다 알 수 없도록 만드셨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거짓말은 참일까?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져 있는 지혜서 전도서에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 1:14]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서 1:17]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도서 2:11]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전도서 2:17]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2:26]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4:4]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전도서 4:6]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4:16]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전도서 5:15,16]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6:9]

 

그러나 지혜의 왕 솔로몬처럼 이 세상의 온 바람을 다 잡은 사람이 누가 또 있을까?

 

그러므로 자기 심연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자.

심연이 다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바람 아래를 바라보며

바람 위에 서 있다

 

과거가 아닌 현재가

심연이다

 

이 시인의 말은 슬프고, 아름답고, 그리고 무섭다.

인생을 꿰뚫는 꼬챙이에 찔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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