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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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

by 브린니 2021. 1. 3.

바울, 우리 시대 새로운 주체의 유형

 

 

이 책은 “왜 바울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과제는 진리라는 주제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주체의 실존을 다중적 존재의 순수한 우연에 종속시킬 수 있는 주체 이론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바울)의 이름을 이러한 도정의 전개 속에 기입할 것인가?”

 

바디우는 바울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진술을 환원하는데 이것이 우화에 가깝다고 말한다. 예수의 출생, 가르침, 죽음 등은 확인될 수 있는 것이지만 부활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우화란 이야기 중 명백히 상상적인 모든 것에 결부되어 있는 보이지 않으며 간접적으로만 접근이 가능한 잔여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어떠한 실재에도 가닿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인이 아니라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수의 시대 유대인들은 예수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유대인들, 특히 지배계층에 있는 왕과 제사장, 율법학자, 서기관들은 예수라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의 토대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든 아니든, 선지자나 메시아이든 아니든, 죽여버리면 그뿐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던 하나의 진리, 그 진리의 토대가 무너지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진리는 신의 율법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넘어선 사랑을 가르쳤다. 그것이 진리이다. 예수의 사랑의 진리를 믿는 사람들을 법 위에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진리로 믿게 되었다. 그것은 법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진리, 즉 율법이 계속 생명력을 지니고 사람들을 지배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했다! 예수가 부활한 사건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가 승천한 이후에는 부활했다는 증거 자체도 사라졌다. 부활한 예수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예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문제였다. 아무 증거도 없는데 믿는다는 것은 최상의 믿음이었다.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증거 확인에 불과하다.

 

믿음은 역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다. 내가 믿는다는 사실이 바로 사실의 증거인 것이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사실의 증거로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믿음의 증거로서(믿는다는 것이 그 자체로 증거가 된다)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인 확증이 바로 믿음의 현실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예수에서 바울로 넘어간다. 예수는 죽었지만, 아니 부활했지만, 신으로서 추앙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믿음의 증거는 아니다. 믿음의 증거는 신앙인들 각자의 ‘믿음 그 자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가 인류를 위해 죽었으며 부활했고, 항상 인류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 믿음의 주춧돌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가 다시 온다는 재림에 대한 신앙은 존재할 수 없고, 그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토대는 부활에 있으며 믿음의 소망은 예수의 재림이다.

 

예수 이전의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아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가 다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두 번째 믿음은 예수의 부활로부터 시작된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한 재림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가 부활했다는 불가능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예수가 재림한다는 믿음을 가능하게 만든다.

 

바울은 바로 이 두 가지 믿음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신 바울은 예수를 증거하는 동시에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한다. 단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 자신들의 믿음을 스스로 확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바울은 신앙인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증인이 되게 한다. 바울은 생전에 예수를 본 적이 없는데도 믿고 자신이 믿음의 눈으로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다고 증거한다. 

 

초기에 예수는 생전에 만난 사람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바울 이후에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믿음을 전파한다. 전파되는 대상이 예수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다시 바뀐다. 아니, 예수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동시에 전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동시에 바울의 말을 믿었으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믿음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한층 강화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진정한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고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구축한다.

 

 

예수는 인간의 몸으로, 메시아로 왔으며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인간을 구원하고, 부활함으로써 신의 지위를 회복하고 세계의 통치자로서 영원히 인류와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탄생시키고 그 종교를 확립한 사람은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교주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인간 바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확고하게 증거한 인물 그 이상의 자리를 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통해 모든 신앙인들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을 확증했을 뿐이다.

 

그는 예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 역시 예수를 본 적이 없으나 예수의 존재를 믿고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의 재림을 믿으며 예수와 동행하고 있다고 증거한다.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고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며 예수와 현실적으로 동행하고 있다는 믿음은 곧 그리스도교의 믿음의 토대이며 근거이며 증거인 동시에 현실적인 믿음의 실체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금 바로 실현되는 체험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신앙인들의 삶의 실체이자 믿음의 증거였다. 다른 증거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 그 자체가 믿음의 증거인 것이다. 그것은 교리인 동시에 삶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신앙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 역시 이것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것이 바울이 자신의 삶과 믿음으로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믿음의 핵심이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증명하며 사는 것이다.

 

 

바디우는 비신앙인으로서 철학자로서 바울에 대한 연구는 ”주체와 관련된 명제와 [율]법에 관련된 질문 사이의 이행을 확립해주고 있는 독특한 결합관계, (……) 즉 어떤 율법이 모든 정체성을 결여한 주체, 어떤 한 사건―주체가 그것을 선언하고 있는 사태 외엔 아무런 ‘증거’도 없는―걸려 있는 주체를 구조화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바디우의 말처럼 바울은 평생 유대인들의 율법과 싸웠다. 그는 어떻게 하면 기존의 율법과 전혀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골몰하면서 이를 위해 투쟁했다.

 

 

바울의 주장은 단순히 말이 아니며, 법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자체가 인간 세계의 균열을 내는 스캔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고 바울 이전까지의 모든 사상 체계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몸으로, 자기 삶으로, 자신의 사랑과 희생으로 완성했다.

다 이루었다!

 

바울은 예수의 사랑을 온전히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생애 내내 주장하고 오로지 그 믿음으로 살았다.

 

바울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주장에 힘입어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자기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갖고 자신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랐으며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와 동행하는 삶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울의 공적 때문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탄생이 어떤 의미였으며, 예수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이 무엇이며, 예수가 가르친 것과 예수가 우리와 함께 이루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사상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가르쳤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고 체험을 증거했다면 바울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일반화하고 동시에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쳤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도록 정확하게 지적해주었다.

 

바울은 예수가 세상의 법 체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했다. 예수는 인간의 삶이 법을 이루며 사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법은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되며 인간을 위해서 작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웠다.

 

 

예수는 생전에 법을 깨는 행동을 자주 했으며 그럼에서도 법을 위반하지 않았으며 늘 그의 행동의 법의 본질, 즉 법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 이바지 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인간을 위해 안식을 주는 것이 참된 의미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죄를 심판하는 법은 죄를 이길 수도 없고,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 죄를 용서하고,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법에는 사랑과 용서가 끼여들 틈이 없다. 법은 죄를 징벌하지 않으면 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면서도 법이 존속할 수 있으려면 거기엔 반드시 어떤 매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법의 집행자가 법을 집행하는 동시에 그 법을 정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만왕의 왕으로 와서 법의 집행자인 동시에 법의 정지자가 된다. 왕만이 죄인을 사면할 수 있다. 현재의 대통령도 특별사면의 권한을 지닌다. 그러나 왕이나 대통령이 특별사면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사면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며 죄인이 그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행위는 달랐다. 그는 죄인의 죄를 자신의 죽음로 대속했다. 법의 집행자이자 법 그 자체인 왕이 죄인을 위해 죽음으로서 그 죗값을 대신 치르었기에 더 이상 그 죄를 물을 수 없는 상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한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반대의견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의 사랑의 행위는 법의 정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을 완전히 완성한다. 죄는 죄대로 그 죗값을 완전히 치르게 하고, 사랑을 통해 그 죄를 완전히 용서함으로써 그 죄가 작동할 수 있는 근거를 제거하고 동시에 법이 죄인을 정죄할 근거 역시 없앴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역설하는 것 역시 이제 더 이상 죄가 인간을 옭아맬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가 만왕의 왕으로서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했으며 죄를 정죄하는 법을 넘어설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예수가 이를 가능하게 했으며 우리가 역시 죄와 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하며 예수와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죄와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없고, 예수와 동행하지 않으면 다시 죄와 법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죄와 법으로부터 벗어날 기회(가능성)을 얻을 수 있으나 예수와 동행하지 않으면 그 기회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구원의 교리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구원받을 기회를 얻는 것이며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동행 즉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에 관한 교리에 대한 동의가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증거가 따라야 한다.

 

A가 B를 믿는다고 했을 때 B가 A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A 역시 B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배신한다면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삶으로써 믿음의 증거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론에 대한 동의가 아니다. 우리는 지구가 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동의이지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므로 믿음은 오직 자기 믿음이 자기 행위로서 확증될 때만이 믿음으로서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의 증거로서 순교를 당했다. 그들이 일부러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죽은 것이 아니다. 단지 순교를 당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기회를 얻는다.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때 그들의 선택과 행위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거나 오히려 저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할 때 발생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은 담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몸소 증거하였고, 이론화하였다.

 

 

바디우는 “참된 것(또는 올바른 것, 이 경우엔 이 두가지가 동일한 것이다)은 원인에 의해서든 아니면 목적에 의해서든 어떤 객관적 총합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바울이 보여준 전대미문의 몸짓은 공동체―민족, 도시, 지역 또는 사회 계급――가 장악하고 있던 진리를 그로부터 벗어나도록 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바디우에게 “바울은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의 모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한결같은 특징들을 실천하고 진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교유하게 확립하는 것은 그러한 사건(예수의 부활)에 대한 충실성은 오직 공동체적인 특수주의를 파괴하는 것 안에서만, 일자와 모두에 대함을 구분하지 않는 진리의―주체를 규정하는 것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바울을 철학자와 동일시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이유가 철학의 특징이 “보편적 진리들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범주를 연마하고 손질함으로써 진리들에 대한 종합적 수용을 조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바울은 진리를 창조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말한 진리의 가르침을 연마하고 손질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그것을 온전한 진리로 수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바울에게 진리라는 사건은 철학적 진리를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바울을 보편성의 반철학적 이론가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바울이 진리의 투사로서 새로운 유형의 주체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진리 공정의 결과를 소활 수 있는 심급은 없으며 진리는 결코 비판과 무관하다. 진리는 오직 스스로에 의해서만 지탱되고, 초월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 않으며, 관건이 되는 진리의 투사로서만 규정되는 새로운 유형의 주체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말처럼 진리는 진리가 진리일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소환할 수없고, 진리는 비판할 수 없다. 진리는 스스로 증거하며 초월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 않다. 오직 진리는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바디우에게 바울은 바로 진리를 말하는 투사로서 새로운 유형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진리에 관해서는 바울은 항상 예수의 진리를 재창하는 수준일 뿐이다. 진리의 투사라면 언제나 예수가 선봉장이다.

 

 

예수는 빌리도의 법정에서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예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바디우의 말처럼 “진리는 오직 스스로에 의해서만 지탱되고, 초월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는 스스로를 증명할 뿐이기에 예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진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예수는 진리를 말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자신이 곧 진리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한다. 그는 자기 스스로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의 행위가 곧 진리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도 죄와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오직 죄와 법을 넘어서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죽는 사랑을 통해 죗값을 대신하는 것뿐임을 알렸다. 이것이 복음이며 진리이다.

 

또한 진리의 담지자인 예수 스스로 죽은 뒤 부활함으로써 죄와 법에 대한 승리와 죄와 법으로부터 구원받은 자의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예수의 증인으로서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의 사랑의 진리를 전세계에 알렸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일 때문에 바울은 진리의 투사가 될 수 있었으며 이전의 세계가 담보하고 있던 법의 체계에 균열을 내고, 진리를 그 곳에 심었다.

 

바울이 전한 예수의 진리는 지난 2천년 동안 세계에 퍼졌고, 지금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바디우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바울의 주체로서의 의미―진리를 진리로서 증명하는 투사―를 다시 한 번 되살리면서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새로운 주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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