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 만남과 지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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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 만남과 지속성

by 브린니 2021. 1. 24.

사랑―만남과 지속, 그리고 영원을 향한 의 무대

 

바디우에게 사랑은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남과 지속성.

 

사랑이란 아주 우연적인 만남으로 시작된 ‘(연인)의 무대’가 각종 시련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을 유지하며 영원을 획득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우연적인 만남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남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며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주어진 상황을 지배하는 법칙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오로지 우연의 형식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두 사람이 만나지 않고서는 사랑은 시작되지도 않는다.

 

낭만적인 사랑의 개념에서는 만남을 거의 운명적인 것으로 여기며 많은 예술 작품에서도 첫만남의 강렬한 순간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만남을 통해 둘의 무대가 만들어지고 그 둘이 경험하는 세계가 지속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의 무대는 영원을 향해 숱한 시련들을 함께하면서 지속한다.

 

 

<사랑 예찬>은 철학자 알랭 바디우와 니콜라 트리움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1 위협받는 사랑

 

알랭 바디우는 사람들에게 위험이 없는 안전한 사랑을 선택하라고 선전하는 인터넷 미팅 사이트의 광고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 시작한다.

 

미팅 사이트는 파트너들의 얼굴 사진에서부터 성격과 취향 등을 막라하는 정보를 제공하면서 마음에 드는 파트너들과 위험부담이 없는 사랑에 빠지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바디우는 위험이 부재하는 이런 식의 ‘증여’는 사랑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의 문제는 타인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회피하려는 데 있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군대가 우리 군대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선전하는 것과 같으며 이런 식의 사랑은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고, 혹 피해가 생긴다하더라도 우리가 아니라 상대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안전한 사랑에서는 사랑이 깨지는 경우 모든 책임은 타인의 몫이 된다. 현대적인 안전 규범에 맞추어 사랑을 훌륭히 준비한 자들은 그들의 편의에 부합하지 않는 타인의 존재를 곧 포기하게 되는 이때 타인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현대성에 편승하지 못했을 뿐이니까 말이다.

 

안전한 사랑이란 결국 사랑에 바쳐야 할 열정을 절약하면서 쾌락으로 채워진 즐거운 성적 타협을 소유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2 철학자들과 사랑

 

사랑의 경험은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부르는 무엇을 향한 일종의 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한다.

 

성적인 것은 결합하지 않으며 쾌락이 타자에게서 멀리 떼어놓는다.

섹스는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때 타자는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이용될 뿐이다.

 

섹슈얼리티에서 성관계가 없다면 사랑은 성관계의 결핍을 보충하러 도래하는 무엇이 된다. 사랑은 비―관계를 대신하여 도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서는 주체가 ‘타자의 존재’에 접근하려 시도한다.

 

주체가 제 자신을 넘어서게 되는 것, 나르시시즘을 넘어서게 되는 게 바로 사랑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사랑 속의 타자라는 매개는 그 자체로 가치는 지닌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주체와 함께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주체는 타자를 공략하러 간다.

 

섹슈얼리티의 공백을 상상적으로 메워주기 위해 도래한다. 섹슈얼리티는 일종의 공허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섹슈얼리티는 반복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어 계속해서 반복 되풀이되어야 한다.

 

사랑은 섹슈얼리티의 공백 안에 머물고 있으며 연인들이 섹스에서의 비―관계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섹스의 공백을 채워주는 무언가의 역할, 비―관계가 아닌 인간 관계 그 자체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욕망이 유방, 엉덩이, 음경 등, 페티시스트적 방식과 관련된다면 사랑은 우연히 내 인생에 불쑥 나타난 타자 그 자체와 관련된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적 욕망이나 섹스가 사랑과 무관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육체적 욕망과 섹스가 사랑이라는 개념의 보충물로서 기능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섹스가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쾌락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것일 수 있다는 위험이 항상 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섹스가 대상을 도구화하면서 둘을 하나, 하나로 분리할 때 사랑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선언은 만남이라는 사건을 확정해주기 때문에 매우 근본적이며 책임을 부여한다. 타인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는 사랑에 대한 위임의 증거로서 가치를 지닌다.

사랑은 타인이라는 존재의 총체성에 관련되며 육체의 위임은 이 총체성의 물질적 상징이다.

 

사랑은 실존적인 제안이다.

사랑은 단순한 나의 생존 충동이나 내가 잘 알고 있는 이해관심에 비추어, 탈중심적인 관점에서 어떤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사랑은 의 무대이며 동일한 하나의 차이가 된다.

사랑의 주체는 우리 양자의 프리즘을 거쳐 세상에 전개된다.

사랑은 언제나 세계의 탄생을 목격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3장 사랑의 구축

 

사랑 안에서 우리는 분리이자 구분이며 차이이다.

두 사람은 인 무엇을 갖게 된다.

인 무엇이 모습을 드러내고 무대에 등장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이 불확실하거나 우발적인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사랑은 항상 만남에서 시작된다.

만남, 하나의 사건, 사물들의 즉각적인 법칙에 속하지 않는 무엇에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다.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패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다.

 

 

바디우는 ‘의 무대’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을 말할 때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으로 많이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서로를 통합해버리는 것이다.

 

바디우는 둘이 둘로서 존재하면서, 차이를 유지한 채 이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는 무대를 연출하는 사랑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사랑은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서는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서로 만난다는 것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사랑은 만남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황홀감은 분명 존재하지만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

 

사랑은 삶의 재발명이다.

 

 

4장 사랑의 진리

 

사랑은 진리의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다.

 

사랑은 시련을 받아들이고, 지속될 것을 약속하며,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의 경험을 수용해나가는 모든 사랑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차이에 관한 새로운 진리 하나를 생산해낸다.

 

사랑에는 보편적인 무엇이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대면하고 서로가 서로를 경험할 수 있다.

 

 

대담자가 바디우에게 묻는다.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선언의 단계가 중요하다. 사랑을 말하는 행위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선언을 통해서 사건의 구조 안에 등재되는 것이다.

사랑, 만남이라는 우발적이고 우연한 특성에서 시작되는데 사랑의 선언은 우연이 고정되는 순간을 뜻한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으로부터 지속성, 끈덕짐, 약속, 충실성을 이끌어낼 것이다.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 선언됨으로써 그것은 행위로 사건으로 나타난다.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 수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많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끝은 늘 재앙을 불러온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언제나, 영원히’를 포함한다, 그것은 사랑의 끝을 거부한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랑이 영원을 선언한다.

 

 

사랑을 포기하면 삶이 완전히 무미건조해진다.

사랑은 하나의 강력한 힘, 주관적인 어떤 힘이다.

 

사랑의 행복은 시간이 영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대담자가 묻는다.

둘의 무대에 아이가 탄생하는 것은 둘의 연장인가, 둘을 분리하는 것인가?

 

바디우는 아이의 탄생은 하나의 지점,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긴밀해지는 특이한 한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순간에 사랑을 “다시 선언”하도록 강제하면서 재연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의 지점이란 사건을 받아들이고 선언했던 최초의 순간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근본적인 선택을 갑작스럽게 취할 수밖에 없게끔 강제하는 그런 순간을 뜻한다.

 

아이가 탄생했을 때 나는 이 우연을 받아들이고, 빈번히 그리고 급박하게, 사랑의 선언을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아이의 탄생은 기적인 동시에 난관, 일종의 시련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을 아이 주위로 재편성해야 하고, 최초에 선언된 사랑이 다시 선언 되어야 한다.

 

사랑이란 애초에 격렬한 실존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탄생은 이런 위기의 하나의 지점일 뿐이다.

 

 

5장 사랑과 정치

 

바디우는 질투에서 경쟁자(연적)는 완전히 외부에 있으며, 사랑을 규정하는 일에는 조금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질투는 사랑의 인공적인 기생물이며, 사랑의 정의 안으로는 결코 진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난점은 사랑의 절차 속에 내재, 차이의 창조적 놀이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이다.

진짜 적은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이다.

 

사랑의 절차는 난폭한 물음, 견디기 힘든 고통, 우리가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이별 따위를 동반한다.

사랑의 절차는 주체적인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들 가운데 하나이다.

 

사랑 역시 모순과 폭력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사랑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충돌을 가장 확연하게 겪게 되는 경험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항상 불가능성의 지점을 극복한다.

사랑은 가능성이 아니며 불가능한 무엇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은 어떤 불가능성의 극복이다.

정치적 문제는 증오를 통제하는 문제이지 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진리의 절차가 모두 그러하듯이,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떠난 것이다.

사랑의 가치는 오로지 그 자신 속에 머무르며, 이러한 가치는 사랑과 결부되어 있는 두 개인의 즉각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6 사랑과 예술

 

예술은 제 모든 형식 속에 사건 그 자체를 담아내는 위대한 사유이다.

사랑은 한 사건이 존재에 스며들어 도래하는 순간이다.

 

사랑은 법으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사랑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현실주의는 존재 안에서 혁명을 가능하게 할 구체적인 재료로서 사랑과 섹슈얼리티에 관심을 기울였다.

초현실주의자는 지속에 별 관심이 없다. 사랑을 특히 환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의 시처럼 제안할 뿐이다.

 

그러나 사랑은 덜 기적적이면서 훨씬 더 힘들여 노력하는 영원성의 개념, 집요하고 끈덕지게 이루어진 시간적 영원성의 구축을 제안한다.

 

사랑에는 주된 업무가 있다.

늘 활동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하며, 주의해야 하고, 저 자신이나 타자와 함께 결집되어야 한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형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힘들여 노력한 일의 내재적 보상으로 행복이 존재하는 것이다.

 

 

연극은 몸으로 이루어진 사유이다.

어떤 사유가 공간 그리고 몸짓과 맺고 있는 관계는 복잡하다. 즉각적인 동시에 계산되어 있어야 한다.

욕망이 즉각적인 힘이라면, 사랑은 정성과 재연을 요구한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사랑은 하나의 사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랑은 육체이며 욕망이자 감정의 움직이며, 이성과 사유가 아닌 모든 것이라는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사유와 몸 사이의 관계는 아주 특이하며, 필연적인 어떤 폭력으로 늘 각인되어 있다.

사랑이 우리의 몸을 복종하게 만들고 거대한 고통을 유발한다.

성을 지닌 두 육체 사이를 왕복하는 무엇처럼 드러나는 사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바디우는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7 결론

 

우리는 사랑에서 차이를 의심하는 대신 차이를 신뢰하고 믿을 것이다.

 

사랑은 만남이라는 우연에서 사랑은 시작되지만 반복을 포함한 지속성, 일상의 반복처럼 사랑은 스스로 자기 선언(나는 너를 사랑해)을 갱신하면서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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