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장승리 <반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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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장승리 <반과거>

by 브린니 2020. 12. 30.

반과거

 

 

모든 아침은

가장 오래된 아침이야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마

 

절정의 목련 앞에선

늦었다는 느낌이 들어

 

다른 봄이

코앞이야

 

내가 멈춘 게 아니라

길이 멈춘 거야

 

그 길 걷는 일을

멈출 수 없어

 

―장승리

 

 

【산책】

 

반과거는 프랑스어에서 사건 부연 설명을 위해 쓰인다.

사람의 외모, 감정, 상태나 사건의 배경 등을 묘사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과거 진행 행위와 과거 습관을 서술한다.

 

 

모든 아침은

가장 오래된 아침이야

 

아침은 새로운 날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가장 오래된 아침은 새로운 날의 시작이란 의미보다는 아침이 날마다 반복되어 왔다는 의미가 강하다.

 

아침은 태초의 날부터 지금까지 가장 오래도록 반복되어온 것이다.

습관처럼.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마

 

앞 구절과 반대로, 희망이란 미래를 뜻하는 말인데 오히려 과거를 향하고 있다.

과거는 희망으로 결코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희망을 걸어도 과거는 굳은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희망이란 과거를 향하든 미래를 향하든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절정의 목련 앞에선

늦었다는 느낌이 들어

 

다른 봄이

코앞이야

 

목련은 활짝 피었다, 하는 순간 이미 지고 있다.

하얀 목련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주먹만 한 눈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코앞에 다른 봄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목련에서 눈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내가 멈춘 게 아니라

길이 멈춘 거야

 

그 길 걷는 일을

멈출 수 없어

 

길은 스스로 걸어다니지 않는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곳곳으로 뻗어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길은 보이지 않다가 하나의 길을 다 걸어간 끝에 다른 길이 나타난다.

길은 한발짝 걸어갈 때마다 그만큼 더 늘어난다. 결국 길이 스스로 걸어가는 듯하다.

 

그런데 그 길이 가기를 멈춘다?

멈춘 길 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 가는 일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

 

길은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은 과거와 같다.

그러나 그 길은 계속 어딘가를 향해 뻗어 있어 마치 미래로 향하는 것 같다.

 

길은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이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

길은 길로 이어진다.

 

 

습관처럼 아침이 오고

길을 걷는다.

 

내일도 해는 뜨고, 그 해는 이미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과 몇 달 전 몇 년 전에도

습관처럼 뜨고 졌던 바로 그 태양이다.

 

인생의 일상 역시 그러하다.

내 인생에서 일상은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하루는 하루만이 아니라 수천 년의 날들을 함께 품은 날이다.

일상이 반복되듯 과거는 희망처럼 미래에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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