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정남식 <저녁노을, 낮은 한숨으로 지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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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정남식 <저녁노을, 낮은 한숨으로 지는 그대>

by 브린니 2020. 12. 24.

저녁노을, 낮은 한숨으로 지는 그대

 

 

여름 한낮 구름의 얼굴

하늘 푸른 거울에서 하야말간 낯을 지우며

햇빛은 우리 사랑의 물기를 고양이처럼 핥는다

길 떠난 사랑 또한 오지 않고

 

먹을거리 가게의 처마 끝엔

웬일인지 여름 고드름이 무장 열리고

오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견디며

고드름을 서서 따먹는다

꼬드득, 씹는 혀끝으로 내 사랑 부르리라

 

사랑은 지루하게 더디고

구불구불한 날들의 끝처럼

텅 마른 그대 날 저물 듯이 오리라

그대, 구름 같은 그대

하늘 푸른 거울에 낯 붉히며 비치는 구름이여

저녁노을, 낮은 한숨으로 피었다

지는 그대

 

―정남식

 

 

【산책】

 

노을로 물드는 저녁시간을 좋아해서 석양이 지는 바다로 가끔 나간다.

노을이 지는 강이나 호수도 아름답다.

 

그냥 들판이면 어떠랴.

산꼭대기에서 지는 해를 만나는 것도!

 

노을은 해의 끝이다.

어둠이 곧 시작된다는 징조이다.

 

저물녘 시간은 매우 짧다.

푸르다가 노랗거나 붉게 물들면서 서서히 어둠이 짙어진다.

 

어둠이 몰려오기 직전의 시간은 불안하다.

그러나 불안할수록 매혹적이다.

 

불안을 즐기는 시간,

어쩌면 매일 몇 번씩이나 해가 지는 걸 구경했던 어린 왕자도 장미에 대한 사랑과 불안 때문에 노을을 보며 마음을 달랬던 것은 아닐까.

 

노을이 지는 바닷가,  파도는 불안이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밀려온 만큼 파도는 밀려나간다.

 

혹은 밀려온 만큼은 아니더라도 반쯤은 밀려나간다.

노을이 지면서 밀물이 들어온다.

 

불안은 마음의 문을 열고 있어도 굳게 닫아도 스미듯 들어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은 뭔가 임박한 결말을 불러올 듯하다.

 

 

햇빛은 우리 사랑의 물기를 고양이처럼 핥는다

길 떠난 사랑 또한 오지 않고

 

오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견디며

고드름을 서서 따먹는다

꼬드득, 씹는 혀끝으로 내 사랑 부르리라

 

사랑은 지루하게 더디고

구불구불한 날들의 끝처럼

텅 마른 그대 날 저물 듯이 오리라

 

사랑은 여름 한낮의 고드름처럼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사랑을 먹고 마시는 날들은 얼마나 찬란한가.

 

그러나 사랑의 저녁은 사랑의 어둠을 야기한다.

 

저녁노을, 낮은 한숨으로 피었다

지는 그대

 

까탈스러운 고양이 같은

불안을 재우기 위해 내쉬는 깊고 낮은 한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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