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산문집 <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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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이병률 산문집 <끌림>

by 브린니 2020. 12. 20.

말에 끌리고, 생각에 끌리고, 말과 생각의 겹침, 사람과 사랑의 두 겹.

 

 

이병률의 산문을 읽으며 글귀를 따라 이런저런 생각을 덧붙인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글은 글귀를 따라 붙는다.

 

 

 

열정이라는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다.

열정은 ……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강물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열정이 없다는 것보다 무기력하고 슬픈 것은 없다.

 

 

요즘은 이발소를 찾기 어렵다.

대개는 이용원이라는 간판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이발소.

 

요즘 남자라도 헤어숍에 간다.

미용실도 아니고 꼭 헤어숍이라고 부르는 그곳.

 

미용사의 아내(사랑한다면 이들처럼)라는 멋진 영화가 있다.

예전에는 면도하는 여자들이 이발소에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발사의 임무는 머리를 자르는 것뿐만 아니라 면도하는 것도 포함한다.

서부 영화를 보면 이발사에게 목덜미를 맡기고 느긋하게 몸을 젖히고 앉은 카우보이 혹은 총잡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거대한 면도칼날 앞에 자기 목을 내맡긴 채 평온하게 잠들 수 있다니!

 

면도를 위해 뿌연 거품을 내는 이발사의 손놀림, 부풀어 오르는 비누거품,

약간 역한 냄새들,

코 근처와 턱 근처에 닿는 비누거품의 들척한 느낌,

 

그렇게 면도는 시작된다.

거의 사흘 동안 그 냄새는 코끝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면도날이 턱 주위를 스윽스윽 지나가는 느낌 또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일회용 면도기나 전기면도기의 느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단단한 면도날이 살을 지나며 수염을 깎는 느낌은 살벌하고, 깔끔하다.

 

 

사랑은 한 사람만으로 이룰 수 없다.

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오직 둘만이 사랑이라는 말에 응답할 수 있다.

 

 

 

모든 일에 시간이 들듯이 사랑에도 시간이 든다.

당신은 나에게 그 시간을 내어준다.

 

조금이 아니라 전부를 내어줄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마음 그리고 시간.

 

나에게 시간을 달라.

당신을 사랑할 시간.

 

 

 

캄보디아에서 가이드 역할을 했던 ‘던’이라는 친구의 전화를 끊고,

시인은 세수를 하러 간다.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은 무엇으로 붉어져 있다. 그것이 앙코르와트를 감쌌던 노을 같기도 했고 앙코르와트를 적시던 아침 태양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은 세수를 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붉었다.

 

노을 혹은 아침 태양의 흔적이 얼굴에 묻어 있다. 그래서 얼굴은 붉게 타오른다. 아니, 타오르는 것은 아니고 붉게 젖어 있다고나 할까.

 

다른 나라, 다른 도시, 다른 장소에서 만난 해, 늘 보는 태양인데 거기서 만난 해의 기운이 여기에까지 따라와 기어코 얼굴을 붉힌다. 부끄러운가. 흥분되는가. 설레는가.

 

 

모리스 텡샹, 트란 트롱.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아버지가 프랑스인, 어머니가 베트남인 친구.

 

프랑스인도 베트남인도 아닌, 그러나 둘 다인.

동서양이 반반씩 섞인, 신비하고, 매혹적인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야누스.

 

 

― 탱고

 

 

춤을 추는 두 사람은 잔잔한 호수를 걷는 새들처럼 부드럽고 날렵하다.

조금이라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절대 출 수 없는 춤.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

 

 

 

이병률의 <끌림>은 시인이 1994년부터 2005년까지 해외여행을 하면서 느낀 감상들을 적은 가볍지만 아름다운 산문집이다.

 

 

유럽, 중남미, 인도, 중국, 동남아, 터키……

 

 

약간 비켜서서, 조금 물러나서, 보는 것들 속에서 엿보기, 드러난 것들 속에서 들추기.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의 힘으로 되살려내기.

 

 

끌리는 것,

끌리는 대로,

혼자여서

혹은 둘이서,

 

 

카메라가 찍은 풍경들

눈에 담은 정경들,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

 

이런 저런 이야기와 사연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는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풍경 사이

사람과 삶과 문화와 예술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와 사색들.

 

<끌림>은 이런 것들이 모인 작지만, 작아서 아름다운 세상이다.

 

카메라와 글로 만든 세상.

눈과 마음과 혹은 사랑으로 엮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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