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서정주 <푸르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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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서정주 <푸르른 날>​

by 브린니 2020. 12. 22.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네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산책】

 

우울하고 울적하고 쓸쓸하고 어두컴컴한 가을날에는 말고,

햇살이 쨍하고, 하늘이 푸르고, 날씨가 청명한,

 

그런 푸르른 날,

짙푸르는 날,

푸름이 짓무르는 날,

 

그런 날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그리움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게.

 

원망도 후회도,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냥 그대로 그리워하자.

한 사람을 그냥 그의 존재만으로 그리워하자.

 

어떤 사연이나 스토리나 인생사, 다 묻고

그 사람만으로 그리워하자.

 

그때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었던 그 사실만을,

그 느낌만을 그 온기와 체온만을 그리워하자.

 

맑고 깨끗한 날, 푸르른 날

너무나 푸르고 깊어서 푹 빠져서 한참을 헤엄치고 나왔을 때

 

온몸에 푸른 물이 배어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온몸에 퍼렇게 멍이 들어서 결코 지워지지 않도록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아프게 그리워하도록!

 

결코 잊을 수 없도록

오직 푸르고 맑고 깨끗하게 밝아서

 

너무 날씨가 좋아서 그 사람을 찾아서 멀리 떠나고 싶은 그런 날에만

그리워하자, 그리운 사람을!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벚꽃 흩날리는 푸르른 봄날과

노랗고 붉게 단풍드는 가을날에

 

눈이 하얗게 뒤덮여 푸른빛 도는 겨울날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그 사람이 죽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

내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사람을 그리워하자.

 

그리워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는 인생

아마도, 어쩌면 행복하랴.

 

 

https://www.youtube.com/watch?v=WCw9we6jL9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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