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신해욱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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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신해욱 <실비아>

by 브린니 2020. 12. 28.

실비아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 개의 막대기로 재어본 주님의 길이는 너무도 초라한 것이어서

손님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꿇은 무릎을 한 번 더 꿇고

키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발소리가 다가왔습니다

 

물이 돌을 다루듯

할머니가 손님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뜨겁게 타버린 은혜

 

차갑게 결여된 의미

 

언제나 임박해 있는 시간

 

눈꺼풀이 떨렸습니다

 

―신해욱

 

 

 

【산책】

 

문은 열려 있습니다. 예수에 의한 구원은 언제나 문이 열려 있어 아주 쉬운 길이라고,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합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열려진 문으로 들어갑니다. 막다른 곳에서는 유일한 출구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리로 달려가고 맙니다.

 

그 문 안으로 들어가 보게 되는 주님의 길이는 너무도 초라합니다. 초라할 뿐 아니라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굴욕적이기도 하고 도망가고 싶을 만큼 치욕적이기도 합니다. 그의 십자가는 수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두 개의 기준이 있습니다. 두 개의 막대기로 우리는 이리 재고 저리 재봅니다. 영혼의 막대기로 한번, 세상의 막대기로 한번, 영혼의 막대기는 내가 살아온 시간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야할 시간이기도 합니다. 갈 수 있을지,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야할 곳을 가리키는 막대기, 그리고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고 그것은 그저 꿈일 뿐이며, 따라갈 경우에 어둠과 같은 구덩이가 기다릴 뿐인 암흑과 같은 불확실성이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막대기.

 

두 개의 막대기를 들고 선 우리는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무릎을 꿇었다고 말하지만 무릎을 꿇은 것인지, 주저앉은 것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두 가지는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도망치듯 들어간 그 문 안에서 우리는 손님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초대된 손님, 초대장은 내가 원해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초대받은 손님으로 불립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그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도록 삶으로부터 인도되어 들어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은 그 문으로 가도록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손님으로서의 바른 의복과 태도는 무릎을 더 낮추어 키를 맞추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일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삶은 우리의 무릎을 꿇릴 정도로 우리를 여러 번 울게 할 테니 말입니다.

거기서 다가오는 발소리는 우리가 온 삶을 다 기대하며 기다렸던 순간인지 모릅니다. 우리를 있게 했던 제1원인, 혹은 신! 그를 만나는 순간이니 말입니다.

 

재밌네요. 흰 수염을 휘날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라 말입니다. 할머니가 아니라 아이, 혹은 흑인 여성, 남미의 거친 남성, 혹은 인디언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분은 어디에든 무엇이든 누구이든 상관없는 형태로 설명될 수 있고, 혹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지요.

 

시인은 할머니가 물이 돌을 다루듯 손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렇죠.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서 할머니를 소환한 것이죠. 인생의 모든 것을 아는 누군가, 거친 돌도 부드럽게 어루만져서 둥글게 만들 수 있는 존재, 할머니로 주님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은혜는 왜 뜨겁게 타버렸을까요? 왜 의미는 차갑게 결여되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은 죽을 것처럼 두려울 거라고 하더군요. 죄의 불길 속에 은혜가 타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 같습니까? 우리의 죄된 삶은 은혜를 불태우며 살지요. 끊임없이 아파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은혜가 다 타버리고 나면 비로소 삶의 속임이 끝나고 우리 앞에 문이 열리니까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깨닫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의 온 삶을 지탱하던 것이 바로 은혜였다는 것! 나는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그 은혜를 먹고 그 은혜를 불태우며 지금까지 생명의 불꽃을 연장시켜왔다는 것.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서 피 흘린 의미는 늘 차갑게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인간 전체가 그 의미를 배반하여 영하 수만 도의 우주 바깥으로 밀어내어도 그의 구원은 그대로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이 바로 심판이며, 심판의 시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임박해 있다는 것.

 

그 모든 깨달음이 일순간에 밀려오는 그 순간! 할머니가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우리의 눈꺼풀은 떨립니다.

 

주님의 품에 안길 그날을 기다린다고 희망에 차서 혹은 간절한 그리움에 차서 은혜롭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상상이지요.

 

그러나 그들도 막상 그 순간이 닥치면 눈꺼풀이 떨릴지 모릅니다. 시인의 첨예한 인식은 삶의 순간들을 날카로운 칼처럼 꿰뚫어 숨 쉬는 순간순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를 불태워 소진하며 배반의 찬 시간을 살아 그분께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가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깨달아 떨게 될지 예민하게 만져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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