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페르난두 페소아 <기울어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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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페르난두 페소아 <기울어진 비>

by 브린니 2020. 11. 26.

기울어진 비

 

 

1

무한한 항구에 대한 내 꿈이 이 풍경을 가로지르고

부두에서 멀어지면서 수면에 그림자로

햇빛 비치는 저 오래된 나무들의 잔상을 끌고 가는

거대한 배의 돛들로 꽃들의 색깔은 투명하다……

 

내가 꿈꾸는 항구는 그늘지고 창백하고

이 풍경은 이쪽을 비추는 햇살로 가득하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 오늘의 태양은 그늘진 항구

그리고 항구를 떠나는 배들은 햇볕을 받는 나무들……

 

이중으로 해방되어, 나는 아래의 풍경을 떨쳐버렸다……

부두의 그림자는 깨끗하고 평온한 길

마치 벽처럼 세워지고 일어나는

그리고 배들은 나무 둥치들 속을 지나간다

수직으로 수평으로,

잎사귀들 사이로 닻줄을 하나씩 물속에 떨어뜨리며……

 

내가 누구를 꿈꾸는지 나도 모른다……

갑자기 항구의 바닷물이 전부 투명하다

그리고 나는 바닥을 본다, 마치 그곳에 펼쳐진 커다란 판화 같은,

이 풍경 전부를, 줄지어 선 나무들, 저 항구의 이글거리는 길,

그리고 항구에 대한 내 꿈과 이 경치를 보는 내 시선 사이로

지나가는 항구보다 더 오래된 배의 그림자

그것이 내 가까이로 다가와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내 영혼의 다른 면을 스쳐 지나간다……

 

2

오늘 내리는 빗속에서 교회 내부가 밝혀진다.

켜지는 촛불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더 많은 비……

빗소리를 듣는 건 날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그건 불 밝혀진 사원이니,

그리고 바깥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유리창은 안에서 들리는 빗소리……

 

높은 제단의 화려함은 언덕들을 거의 보지 못하는 나

비 사이로 그것은 제단 위 융단에서 너무도 장엄한 금……

합창대의 라틴어 노랫소리가 들리고, 내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

합창대의 존재에 물줄기가 쉿쉿 소리를 내는 게 느껴진다……

 

미사란 지나가는 한 대의 자동차

오늘같이 슬픈 날에 무릎 꿇은 저 신자들 사이로……

갑작스러운 바람이 한층 더한 광채 속에서 흔들어댄다

성당의 축제와 빗소리가 모든 것 삼키고

신부의 목소리만 들릴 때까지 물은 저 멀리 흘러간다

자동차 바퀴 소리와 함께……

 

그리고 성당의 불들이 꺼진다

그치는 빗속에서……

 

3

이집트의 거대한 스핑크스가 이 종이 안에서 꿈을 꾼다……

나는 쓴다 ― 그리고 그것이 내 투명한 손을 통과해 나타난다

그리고 종이 귀퉁이에 피라미드가 세워진다……

 

나는 쓴다 ― 내 깃펜 펜촉이

키오프스 왕의 옆모습이 되는 걸 보는 게 거슬린다……

나는 갑자기 멈춘다……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나는 시간이 빚어낸 심연 속으로 추락한다……

피라미드 아래 묻혀 나는 이 램프의 밝은 불빛 아래 시를 쓰고

이집트 전체가 내가 깃펜으로 긋는 선들로 나를 내리누른다……

스핑크스가 속으로 웃는 게 들린다

나의 깃펜이 종이 위를 내달리는 소리……

내가 볼 수 없는 거대한 손이 나를 관통하여,

 

내 뒤에 있는 천장 구석으로 모든 것 쓸어버리고,

내가 쓰고 있는 종이 위, 그것과 쓰고 있는 깃펜 사이에

키오프스 왕의 시체가 눈을 부릅뜨고 날 바라보며 누워 있다.

그리고 교차하는 우리의 시선들 사이로 나일 강이 흐르고

깃발을 휘날리는 배들의 환희가 떠돈다

사선으로 퍼지는 가운데

나와 내가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오래된 금으로 장식된 키오프스 왕의 장례식 그리고 나……!

 

4

작은 챔버린 같은 이 방의 적막……!

벽들은 안달루시아에 있다……

빛의 흔들림 없는 광채 속에 관능적인 춤들이 있다……

 

갑자기 온 공간이 멈춘다……,

정지하고, 미끄러지고, 펼쳐진다……,

그리고 천장의 모서리, 그로부터 훨씬 더 먼 곳에서

흰 손들이 비밀의 창문들을 열고,

저 바깥은 봄날이기에

떨어지는 제비꽃 가지들이 있다

눈을 감고 있는 나의 위로……

 

5

저 바깥에는 햇볕의 선회, 회전목마들의 말들……

나무들, 바위들, 언덕들, 내 안에서 멈춘 채 춤춘다……

불 밝힌 시장의 절대적인 밤, 저 바깥 한낮의 달빛,

그리고 축제의 온 불빛들이 정원 울타리에서 소리를 낸다……

항아리를 머리에 인 찬 무리의 소녀들

태양 아래 있다 못해 저 바깥을 지나서,

시장 가득히 서로 달라붙어 있는 군중 사이를 가로질러 간다.

시장의 가판대 불빛들, 밤과 달빛에 온통 뒤섞인 사람들,

그리고 두 무리가 만나고 서로 섞인다

둘인 하나가 될 때까지……

시장과, 시장의 불빛과, 시장을 거니는 사람들,

그리고 시장을 집어 공기 중으로 들어 올리는 밤은

한껏 햇볕을 받는 나무 꼭대기에도 있고,

태양 아래 빛을 발하는 바위들 아래에서도 눈에 띄고,

소녀들이 머리에 인 항아리의 다른 쪽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봄의 풍경은 시장 위에 떠 있는 달,

그리고 소리와 빛 가득한 시장 전체는 화창한 이날의 땅바닥

 

갑자기 누군가가 이 이중의 시간을 마치 체처럼 흔든다

그리고, 두 현실의 가루가, 뒤섞여서, 떨어진다

돌아올 생각 없이 출항하는 선박들의

항구를 그린 그림들로 가득한 내 두 손 위로……

내 손가락 위의 검고 흰 금가루……

내 두 손은 시장을 떠나는 저 소녀의 발걸음,

오늘 이날처럼 고독하고 만족스러운……

 

6

지휘자가 지휘봉을 젓는다,

나른하고 슬픈 음악이 시작된다……

내 유년을 떠올린다, 그날을

마당 한편에서 노닐던

담벼락에 던지는 그 공 한쪽 면엔

초록 개의 미끄러짐, 다른 쪽 면에는

노란 기수를 태우고 달리는 푸른 말 한 마리……

 

음악이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 내 유년 안에

갑자기 나와 지휘자 사이, 하얀 담벼락에,

공이 왔다 갔다 한다, 한 순간엔 초록 개,

다음 순간엔 노란 기수를 태운 푸른 말이……

온 극장이 나의 마당이고, 나의 유년은

모든 곳에 있고, 그 공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슬프고 희미한 음악이 나의 마당을 거닌다

노란 기수로 변하는 초록 개로 갈아입고……

(나와 악사들 사이의 공은 어찌나 빨리 도는지……)

 

나는 내 유년에다 그걸 던지고 그것은

나의 주위에 있는 무대 전체를 가로질러

노란 기수와 초록 개와 노닌다

그리고 담벼락 곡대기에 나타나는 푸른 말

나의 마당에서…… 그리고 음악이 공들을 던진다

나의 유년에다…… 그리고 내 마당 담벼락은

지휘봉 동작들과 초록 개의 어지러운 회전들 그리고

푸른 말들과 노란 기수들로 이루어졌다……

 

극장 전체가 음악으로 된 흰 담벼락

내 유년, 노란 기수를 태운 푸른 말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초록 개가 뒤쫓는 곳……

 

그리고 한족에서 다른 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무들이 있는 곳, 그리고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있는

꼭대기 근처의 가지들 사이로,

내가 샀던 공들이 진열된 가게로

그리고 내 유년의 기억들 사이로 가게 주인이 미소 짓는다……

 

그리고 음악이 무너지는 벽처럼 멈추고,

공은 나의 끊긴 꿈의 절벽 아래로 구른다

그리고 푸른 말 위에서, 지휘자, 검은 색으로 변하는 노란 기수는

감사를 표하고, 달아나는 벽 위에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고개 숙여 절한다, 미소 지으며, 머리 위에 흰 공을 얹은 채,

그의 등 뒤로 사라지는 흰 공을……

 

1914. 3. 8

 

―페르난두 페소아 Fernando Pessoa(포르투갈, 1888-1935)

 

* 기울어진 비 :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산책】

 

매우 긴 시다.

멋진 시구들을 다시 읊조려 본다.

 

 

내가 꿈꾸는 항구는 그늘지고 창백하고

이 풍경은 이쪽을 비추는 햇살로 가득하다……

 

내가 누구를 꿈꾸는지 나도 모른다……

 

지나가는 항구보다 더 오래된 배의 그림자

그것이 내 가까이로 다가와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내 영혼의 다른 면을 스쳐 지나간다……

 

오늘 내리는 빗속에서 교회 내부가 밝혀진다.

켜지는 촛불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더 많은 비……

 

오늘같이 슬픈 날에 무릎 꿇은 저 신자들 사이로……

갑작스러운 바람이 한층 더한 광채 속에서 흔들어댄다

 

이집트의 거대한 스핑크스가 이 종이 안에서 꿈을 꾼다……

나는 쓴다 ― 그리고 그것이 내 투명한 손을 통과해 나타난다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나는 시간이 빚어낸 심연 속으로 추락한다……

 

빛의 흔들림 없는 광채 속에 관능적인 춤들이 있다……

 

갑자기 온 공간이 멈춘다……,

정지하고, 미끄러지고, 펼쳐진다……,

 

저 바깥에는 햇볕의 선회, 회전목마들의 말들……

나무들, 바위들, 언덕들, 내 안에서 멈춘 채 춤춘다……

 

갑자기 누군가가 이 이중의 시간을 마치 체처럼 흔든다

그리고, 두 현실의 가루가, 뒤섞여서, 떨어진다

 

나른하고 슬픈 음악이 시작된다……

온 극장이 나의 마당이고, 나의 유년은

모든 곳에 있고, 그 공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슬프고 희미한 음악이 나의 마당을 거닌다

 

극장 전체가 음악으로 된 흰 담벼락

내 유년, 노란 기수를 태운 푸른 말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초록 개가 뒤쫓는 곳……

 

그리고 음악이 무너지는 벽처럼 멈추고,

공은 나의 끊긴 꿈의 절벽 아래로 구른다

 

 

현실에서 내리는 비는 나를 유년의 뜨락으로 데려다 놓는다.

음악이 흐르고 마당 한가운데 공이 구른다.

 

햇볕이 쏟아지고, 배가 항구를 지나간다.

의식의 흐름은 강물처럼 흐르고 바다처럼 쏟아진다.

 

이중의 시간이 겹치고,

두 개의 현실이 서로를 마주 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음악이 연주되는 극장?

아니면 유년 시절 공놀이를 하던 마당? 

비가 내리는 항구?

이집트 피마리드와 스핑크스 사이의 넓은 사막?

 

시간이 겹치고, 공간이 한없이 확장되는 시詩의 세계.

시인은 자유롭게 두 개의 현실을 넘나들면서 상상을 쏟아낸다.

 

시인의 의식의 흐름이 쏟아내는 풍경들이 반짝거린다.

창백하고, 푸르고, 슬픈 풍경들이다.

 

어린 시절은 도무지 눈물이 난다.

행복했다고 느끼는 것은 기억의 왜곡 때문이다.

 

마당에 덜어진 공을 주우려고 달려가는 어린 소년이

마당 한복판에서 울고 있다.

 

한없이 느리고 나른하고 슬픈 음악이 연주되는 인생의 극장에서

잠이 들면 흐릿하고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추억들이 춤을 춘다.

 

어린 시절 나는 이집트의 왕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도 이제 꿈을 꾼다.

레드 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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