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습격
백화점 정문에서 나를 만나기로 한 약속
일찍 도착한 나는 서 있기도 무엇해 백화점 안을 둘러보는데
미리 와 있는 나는 혼자 뭔가를 먹고 있습니다
저녁이나 먹자고 한 건데, 뭔가 잘못됐나도 싶지만 어엿한 정각이 되고
나는 모르는 척 백화점 앞에서 나를 만납니다
따뜻한 것이 먹고 싶다며 골목을 돌고 돌아 나를 데리고 찾아간 식당,
당신은 태연하게 백반을 먹기 시작합니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우적우적 가슴 안으로 몰아넣고 있는 저 일은
무슨 일일까 생각합니다
그때 오래전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병률
【산책】
다른 사람을 대하며 느낀 것들이 사실 나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이 내게 생긴 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난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어느 날 저녁 백화점으로 갔을 때
너는 없고, 내가 거기 있다.
오랫동안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미워하다 보니 정작 미워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
이런 약속을 수없이 한다.
그런데 밥 한번 먹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약속을 지킨 적이 거의 없다.
사실 밥 한번 먹자란 말은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이다.
결코 지킬 생각조차 없는 약속이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은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약속이다.
★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
나는 몇 개의 나로 분신술을 펼치다가 결국 당신이 된다.
내가 당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인생일까.
한 사람을 이해하고 한 사람을 마음에 두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면서 살아왔다.
당신과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나는 깨닫는다.
당신 역시 내게서 이해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
어떻게 지냈니?
어떻게 지내니?
어떻게 살 생각이니?
이런 질문 없이 그저 밥 한번 꼭 먹자!
따뜻한 밥을 같이 먹으면서 웃어 보자!
사랑하는 당신,
오늘 저녁에 당장 나와 밥 먹자!
말보다 먼저 삶으로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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