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페르난두 페소아 <빨래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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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페르난두 페소아 <빨래하는 여인>

by 브린니 2020. 11. 28.

빨래하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이 욕조의 돌에다

잘도 옷을 두드리는구나.

그녀는 노래하느라 노래하며 슬퍼하네

존재하느라 노래하느라,

그래서 그녀는 기쁘기도 하네.

 

그녀가 옷을 다루듯

나도 언젠가 저렇게

시를 지을 수 있다면

아마도 내게 주어진

온갖 길들을 잃어버리겠지.

 

하나의 엄청난 전체가 있다

생각도 이성도 없이

하는 둥 마는 둥 노래하며

현실 속에 빨래를 두들기는 것……

하지만 내 마음은 누가 씻어줄까?

 

1933. 9. 15

 

―페르난두 페소아 Fernando Pessoa(포르투갈, 1888-1935)

 

 

박수근 <빨래터>

 

【산책】

 

요즘엔 세탁기와 건조기가 모든 빨래를 도맡아서 하고 있지만

예전엔 빨래하는 일이 반나절을 소비하게 했다.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에는 천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삽화로 그려져 있다.

역사드라마를 보면 빨래하는 여인들이 냇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빨래는 여성들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이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예전에 여성들의 입에선 “내가 밥하고 빨래하려고 결혼했나?”하는 말이 자주 흘러나왔었다.

 

여전히 밥은 매일 3번 하지만 빨래하는 일은 많은 부분 기계가 맡아서 하고 있다.

 

무협영화를 보면 흰 빨래가 줄에 가득 걸려서 펄럭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그 사이로 칼을 든 무사들이 활보하고, 붉은 피가 솟구쳐 흰 빨래를 물들인다.

 

빨래가 줄에 걸려서 펄럭이는 모습은 예전에 우리나라 도시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동남아시아의 풍경을 찍은 사진들에서는 집집마다 빨래를 밖에 걸어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흰 빨래.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평온해지고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내 영혼도 깨끗이 빨아서 널어둘 수 있을까?

 

 

여인이 빨래를 하면서 돌에 옷을 두드린다.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빨래를 두드린다.

노래하고 있지만 왠지 슬퍼보이기도 한다.

슬프지만 고되게 빨래하는 일에 힘을 주는 노래이다.

 

그녀는 빨래를 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고된 삶을 살고 있다.

존재하는 것이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노래한다. 슬픈 노래일지라도.

그래서 그녀는 기쁘기도 하다.

산다는 것이.

 

그녀가 옷을 다루는 솜씨는, 빨래하는 솜씨는 프로페셔널하다.

그녀의 노래는 슬프지만 그녀는 존재하고 동시에 기뻐한다.

빨래에는 삶의 희노애락이 들어 있다.

 

시인도 언젠가 저렇게 시를 지을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게 주어진 온갖 길들을 잃어버리겠지, 하고 생각한다.

(시인은 빨래와 같은 일상적인 삶, 하나만을 살지 못하고, 여러 다양한 삶의 이면을 갖고 살아가고 있기에.)

 

빨래는 하나의 엄청난 전체이다.

― 삶의 통일성, 총체성의 세계이다.

 

생각도 이성도 없이

하는 둥 마는 둥 노래하며

현실 속에 빨래를 두들기는 것……

 

빨래는 결코 철학이나 기타 관념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저 노래하며 익숙하게 하던 일을 할 뿐이다.

하는 둥 마는 둥 해도 완벽하다.

 

그것은 여인이 현실에서 거의 매일 하는 일일뿐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영혼을 씻는 일처럼 느껴진다.

거기엔 삶의 진실, 세계의 통일성이 있다.

 

시인은 생각한다.

빨래와 같은 일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 마음은 누가 씻어줄까?

 

영혼을 깨끗하게 빨아서 신 앞에 널어놓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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