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행숙 <다른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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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행숙 <다른 동네>

by 브린니 2020. 12. 1.

다른 동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댁의 화장실을 좀 써도 되겠습니까

폐가 되지 않는다면 흥겹게 먹고 마셔도 되겠습니까

저녁부터 골목이 깊어집니다

다른 동네까지

공손한 거지들이 손을 오므리고 지나갑니다

오목한 손, 저 손이

줄줄 흘리는 것들을 따라

화들짝 놀라서 피하는 사람들을 따라

좁은 길이 생기고

 

양족으로 갈라진 머릿결 같은 무리들이

눈빛을 잃고

잃어버린 것들이 공중에서 얼어붙습니다

거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불을 켤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님

백 년 전의 하인들이 등잔을 받쳐 들고 계단을 올라갑니다

백 년 동안

영원히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비명을 질러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없어져도 좋습니까

우리는 금세 공기 중에서 녹으니까

 

꿈에서 꿈으로 이동하듯

부드러운 우리는 보이지 않으니까

시간처럼

우리를 쫓아오면 금세 다른 동네이니까

험악한 얼굴로 돌아서도 되겠습니까

먼저 개가 짖습니다

사나운 개하고 친해지면 친구가 많이 생깁니다

놀랄 만한 일들은 연속해서 일어납니다

우리 아이가 없어졌어요!

밤중에 대소동이 벌어집니다

 

―김행숙

 

 

【산책】

 

17, 8세기 유럽의 어두운 밤 뒷골목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시이다.

 

다른 동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 아파트 앞에는 유해시설이 들어서서는 안 되고,

건너편 서민 아파트와는 초등학교와 마트를 함께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 있고, 너희들은 저쪽에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는 곤란하다.

 

이웃은 선 밖에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 배려하며 잘 지낼 수 있다.

배려를 잘 해야 선진 시민이다.

 

이쪽으로 침입해서는 안 된다.

당신들은 늘 저쪽이어야 한다.

 

 

어느 날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서

저쪽 사람들이 이쪽으로 넘어와

우리집 화장실을 쓰고,

식탁을 점령한다면?

 

미국 대통령처럼 시멘트 벽을 세우고, 철조망 울타리를 칠 텐가.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처럼 법과 제도 밖의 사람들,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우리동네를 헤집어 놓는다면?

 

 

<다른 동네>는 약간의 공포와 약간의 혐오를 뒤섞어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현실에는 없는 듯한 상상 속의 풍경이지만 우리는 혐오하는 몇 가지 것들에 대하여 공포를 느낀다.

그것 자체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데,

우리가 그것을 혐오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은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혐오하는) 이웃은 가까이 오는 것이 무섭다.

 

사납게 짖는 무섭다.

개는 모두 말 잘 듣는 반려견이 되어야 한다.

 

이 시는 우리 속에서 알 수 없는 공포를 일으키는 것들 불러내 골목을 활보하게 한다.

 

공포는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안 돼, 하고 거절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우리의 밖에서 만나게 될까 두려워 지레 겁을 내는 것이다.

 

혐오는 공포의 이면이다.

뭔가 꺼려지는 것이 있다면 빨리 뱉어내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의 거리낌, 마음의 혐오, 그리고 증오와 공포를 마음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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