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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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장 그르니에 <섬>

by 브린니 2020. 12. 1.

空의 매혹 ― 비어 있음의 가득 참

 

 

장 그르니에는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인생에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아주 결정적인 때가 반드시 존재한다. 나는 어느 순간 이렇게 살겠다고 무언의 약속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다.

 

그르니에는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을 말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 있음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어린 시절 한 사건을 이야기 한다.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예닐곱 살쯤이었다고 여겨진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삼켜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무無의 인상이었다.

 

과연 이 말을 믿어야 할까? 일곱 살짜리 꼬마가 보리수 그늘 아래 누워서 하늘을 관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일까. 그런데 하늘이 기우뚱하면서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보다니! 도대체 이런 체험을 일곱 살짜리 소년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이런 식의 블랙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는 장 그르니에의 삶은 이전과 달라졌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도록 마련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여간 ‘덤으로’ 살아가도록 마련된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삶은 비극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삶이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고, 삶을 살다보면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공空의 매혹에 뛰어들게 된다. 거기엔 공포와 매혹이 뒤섞이는데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 것이다.

 

 

 

이 책의 맨 앞에는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의 서문이 실려 있다. 장 그르니에는 알베르 카뮈의 철학 스승이었다. 스승의 책에 서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카뮈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이 그르니에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카뮈는 스무 살에 이 책 <섬>을 읽고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만큼 섬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 정도로 매혹적인 책임에 틀림없다.

 

카뮈는 스무 살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쓰고 있다.

 

행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오만한 직업으로 삼고 있는 터였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탐욕으로부터 좀 단 곳으로 정신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했다.

 

바로 그 섬세한 스승이 장 그르니에였던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장 그르니에의 섬은 카뮈에게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과 불가능한 사랑에 대해 일깨워준 책이 된 것 같다. 카뮈는 <섬>이 절대와 신성에 대한 명상으로 가득한 여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카뮈는 <섬>을 처음 손에 넣게 된 날의 느낌을 이렇게 회상한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돌아가고 싶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이 서문을 쓰기까지 카뮈는 이 책을 읽고 또 읽고 되풀이해서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런 책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장 그르니에는 아름답고 깊이 있는 문장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몇 구절을 옮겨 본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고양이 물루」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에서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무슨 귀중한 것이 있기에? 아마 이런 생각은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케르겔렌 군도」

 

위대한 풍경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다. 그리스의 사원들이 매우 자그마한 것은 그것이 희망을 허락하지 않는 빛과 가없는 풍경으로 인하여 정신이 혼미해진 인간들을 위한 대피소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행운의 섬들」

 

 

장 그르니에의 <섬>은 지중해의 바다 냄새와 빛으로 가득 찬 산문집이다. 그의 글을 천천히 읽으면서 햇살 가득한 바닷가에서 여유롭게 독서에 빠져드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절대적인 신성과 신비와 인생의 덧없음과 텅 빈 우주의 충만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 이제 책을 다시 펼쳐들고, 먼 나라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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