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소설에 관한 생각 : <성>, <소송>, <실종자>,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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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카프카 소설에 관한 생각 : <성>, <소송>, <실종자>, <변신>

by 브린니 2020. 12. 6.

아버지의 법으로부터

 

 

카프카의 소설들을 읽으면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들어가지 못함, 쫓겨남, 추방당함, 기다림, 허락받지 못함, 버려짐, 해고당함, 재판받지 못함(혹은 재판에 회부됨), 소송당함, 사형선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함, 사랑없음, 등등.

 

카프카의 영혼의 주인공 K, 그의 이름이자 존재이자 자아인 K. 불안과 불길함을 예고하는 까마귀의 K, 소설의 주인공 K는 언제나 세계 밖에서 서성이는 존재로 등장해서 여전히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소설의 끝과 함께 최후를 맞는다.

 

 

『성』의 주인공 K는 성의 주인의 부름을 받고 성 앞까지 오지만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성 앞 여관에 묵으면서 성의 주변만을 맴돌다가 끝내 성에 들어가지 못한 채 결말을 맞는다.

 

『성』은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를 떠올리게 한다. 법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주인공은 몇 날 며칠을 법이 열리기를 기다리지만 열리지 않는다. 법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열리는데 결국 그에게 열리지 않는다. (혹은 오직 한 사람만 그 문을 열 수 있는데 그가 열지 못한다, 혹은 열지 않는다.)

 

법은 만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무엇이다. 그러나 법은 항상 그 대상자에게만 적용될 뿐 만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법이란 보편적 개념이지만 하나의 법(법조항)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법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닌 개별적인 법은 한 사람에게만 그 문을 여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개념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 가운데 하나지만 나의 아버지는 오직 나의 아버지일 뿐인 것처럼.

 

카프카는 태어나서 죽기까지 아버지와의 투쟁에 평생을 보냈다고 알려지고 있다. 유태인 가정의 아버지는 매우 가부장적이며 절대적인 권력(권위)을 지니고 있으며 신처럼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아버지는 유일신이 그러하듯 나에게는 유일한 존재이다. 동시에 신의 법이 절대적이듯이 아버지의 법 역시 그러하다.

 

아버지의 법, 이것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법이란 어떤 법조항을 갖고 있는 성문화된 법이 아니다.

그냥 아버지의 말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 이전에 어떤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법이란 아버지가 만든 어떤 법이 아니라

아버지가 갖고 있는 권위 그 자체로부터 나온다.

 

아니,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선포되는 모든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유일한 법이다.

 

아버지라는 것 자체가 법이라면 아버지와의 싸움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기타 장애와 싸우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투쟁의 대상이 법 자체라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

 

법 자체와 싸우는데 무엇을 가지고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법 위에 있다는 보이지 않는 어떤 정의의 힘을 빌어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정의라는 추상 개념은 법 앞에서 아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특히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정의라는 개념은 찾을 수 없다.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는 정의는 개별적인 주인공의 삶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이다.

 

성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들어가지 못하는 K,

자기에게만 허락된 법 앞에서 서 있기만 할 뿐 들어갈 수 없는(들어가지 못하는) 주인공.

 

이것은 유일한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를 넘어설 수도 없고, 아버지가 될 수도 없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는, 아버지 앞에서 진퇴양난인 주인공의 보편적인 그러나 특수한 존재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아들들이 그러한 동시에 오직 한 사람 K만이 당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은 현실의 모든 아들들의 상황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독자들이 환호하는 것이다.

 

 

『소송(심판)』에는 아무런 죄 없이 소송당하는 K가 나온다.

 

그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는 재판부에 자신의 죄를 알려줄 것과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탄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결국 알 수 없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최후를 맞는다.

그는 죄를 알지 못하지만 자신을 향해 사형선고를 내린다.

 

이 소설은 죄의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

오직 소송과 재판과 선고를 문제 삼는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가 아니라 법과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소송을 비롯한 일련의 법의 과정과 절차에 어떤 탈구, 어떤 빗나감, 어떤 식으로든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죄 역시 과녁, 즉 법에서 벗어난 것이니 죄도 법과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일 수 있다.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

 

법을 아버지로 환원한다면 아버지와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데 그 문제를 결코 풀 수 없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법 자체이므로 이 문제를 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아버지의 어떤 말이나 행위에 따라 문제 자체가 해결되거나 다른 형태로 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들인 주인공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법의 허락을, 법의 인정을, 법의 물러섬, 법이 문 열어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성』의 주인공이 성의 주인의 입성 허가를 기다리듯이, 「법 앞에서」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농부가 그러하듯이.

 

자아성장 소설에서는 아버지를 넘어서거나 극복하거나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그러나 카프카의 소설은 성장소설이 아니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이미 다 성장한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이미 아버지가 되었어야 할 나이일 뿐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주인공들의 앞에는 항상, 언제나, 어디서든 법이 가로막고 서 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권유(혹은 명령으로) 때문에 법대에 입학해서 학위를 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법은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며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법은 그의 인생에 대해 현실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법의 길을 거부하고 글쓰기를 선택한다.

 

물론 법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직업으로 삼고 일한다.

(글쓰기는 돈이 되지 않고, 현실적인 어떤 가치를 갖지 못하기에.)

 

더욱이 글쓰기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법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글쓰기는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소설 『변신』은 가족 내에서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는 주인공이 가족으로부터 버려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그레고리는 자신이 커다란 벌레로 변한 것을 본다.

그는 직장에 갈 수 없고, 돈을 벌 수 없고, 가족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으로부터 보살핌을 어느 정도 받지만 끝내 그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자 천대를 받고,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고, 병들어 죽게 된다.

그가 직장에 잘 다녔을 때는 가족들이 그를 인정하고 사랑했지만 그가 아무런 쓸모없는 벌레가 되자 차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죽음을 당한다.

 

아마도 글쓰기란 그런 것이 아닐까.

현실적인 의미를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이 되지 못하는 어떤 것.

심지어 벌레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

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어떤 것.

 

카프카에게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길이 법이 아니라 글쓰기였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 되고 만다.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것.

이것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다.

 

그러나 세상은 한 인간이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그냥 존재하는 것은 벌레만도 못한 것이다.

 

법은 한 인간이 법이 인정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법이 인정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존재 자체를 인정받는 것이다.

 

 

『실종자(아메리카)』에서는 주인공이 아버지로부터 집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건너간다. 거기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외삼촌 집에서 쫓거나고 직장에서도 해고당한다.

 

『성』은 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나 들어갈 수 없지만, 『실종자』에서는 늘 쫓겨나고 추방당한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함과 밖으로 추방당함. 얼핏 보면 정반대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밖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안과 밖이 뒤집힌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무리 안으로 들어가도 다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소설 공간은 뫼비우스의 띠보다는 “어떤 주변”에 있다.

 

즉, 안과 밖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안(內)은 아니고 밖(外)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끊임없이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늘 주변에 머문다. 주변이란 완벽히 밖이라고 하기엔 뭔가 찜찜한 장소이다.

 

주변이란 어떤 주소도 없다.

확실한 장소가 아니다.

 

어떤 장소의 변두리이며 어떤 장소에 딸린 공간이다.

이것은 법에 속하지 못하는 법의 예외이며

아버지의 영역 밖이며 그 영역의 주변,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힘(영향력)이 미치는 넓은 영역의 어느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종자』는 아버지의 영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로 추방당한 주인공이 아버지의 영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조차 온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실종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으면,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면 좋지 않은가.

극복해야 할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으면 자기 인생을 살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주인공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

 

아버지 혹은 법은 어느 곳에나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아버지의 법은 인생 전체(시 · 공간 상관없이)에 힘을 뻗치는 것인가.

죽은 아버지가 더 힘이 세다는 말이 진실인가.

 

아무튼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아메리카에서 정착하지도 못하고, 실종자가 되고 만다. 이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다. 그 경계에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이름붙일 수 없는, 결정할 수 없는, 판단 불가한 것이다.

 

실종자는 그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살아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았다는 증거 역시 아무것도 없다.

 

카프카는 아버지로부터 법으로부터 어떤 인정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래서 끊임없이 글을 쓰지만 오히려 그 글쓰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그 어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닐까.

 

벗어나려고 해도 끌어당겨지는 자석과 같은 힘.

아니, 결코 떠나고 싶지 않고, 아버지의 인정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싶지만

자석의 같은 극처럼 계속해서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

 

아버지와 아들처럼 서로 닮고, 서로 거의 같은 존재란 없다.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존재한다.

 

카프카의 소설은 아버지가 되어야 하지만,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 상황을 그리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이행되는 과정이 왜 그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일까.

왜 법 속에 사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왜 법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법의 주변에만 머무는 것일까.

 

법에 어떤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어쩌면 법이 항상 법의 바깥(예외)를 갖고 있듯이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지만 아버지는 아닌 존재,

자신이 아버지가 됨으로써만이 아버지가 될 수 있는데 아버지가 될 수 없는(아비 되기를 거부하는) 상황에 놓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가 바로 카프카적 상황에 놓인 존재일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결혼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아버지로부터 탈주한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아버지(법) 속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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