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들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이병률
【산책】
나비효과란 말이 있다. 여기서 시작된 몸짓이 저기서는 사건이 된다.
그리움을 밀면 유리창이 밀리고
사랑을 밀면 나무가 밀리고 눈사태가 난다
마음을 밀고, 감정을 밀어본다
그러나 시간을 밀 수 없다.
★
사랑은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처럼 가슴을 쓰리게 하고, 이마를 쓰라리게 한다.
사랑에 마음을 다치면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진다.
감정이 한쪽으로 기울면 인생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사랑 때문에, 아니 사랑하기 때문에
밀리고 밀려서, 북극과 남극을 돌고,
몇 십 갑자를 돌고 돌아서
중심에서부터 밀려서 마른 몸으로 온 당신,
우글우글 무늬 가득한, 아름답고 어린 아이처럼 오는 당신,
아름다움이 밀려나면 새로운 아름다움이 밀려들고,
당신, 그리고 당신들, 당신들의 얼굴이 겹겹이 쌓이고,
아름다움에 패한 당신은 제 몸을 향해 깊숙이 칼을 꽂는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랑이 깊어도 죽을 것 같고, 사랑이 깨져도 죽을 것 같고,
상대를 찌르고, 나를 찌른다.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를 향해 찌르는 칼!
그래서 시인은 깨닫는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나 이름이 밀리는 것이 아니라
(혹은 이름이나 사랑의 흔적이 남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늬를 만드는,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일 따름이라는 것을
★
그러나
사랑은 밀려서 떠내려 가지 않고,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도 지워지지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추억으로 남는다.
사랑했던 시간은 무늬를, 얼룩을, 기억을 남긴다.
무늬가 밀리면서 얼굴에 주름을 남긴다.
나이가 들고 주름이 늘면 슬퍼하지 말라!
그것은 오로지 당신이 푸르도록 사랑하며 살아온 흔적인 것을!
★
* 나비효과
나비의 단순한 날갯짓이 날씨를 변화시킨다는 이론. 1972년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가 처음으로 발표한 이론으로, 후에 카오스 이론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온다는 의미로 쓰인다. 처음에는 과학이론에서 발전했으나 점차 경제학과 일반 사회학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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