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성복 <귀는 위험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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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성복 <귀는 위험할 수밖에>

by 브린니 2020. 11. 30.

귀는 위험할 수밖에

 

그러니 창을 닫고 바람 소리를 듣는 대신 바람 부는 모습이나 바라보리라

―로버트 프로스트, 「이제 창을 닫고」

 

 

눈은 감고 뜰 수 있지만, 귀는 감고 뜨지 못한다. 사막의 낙타는 코를 열고 닫는다지만, 귀까지 열고 닫는다는 말은 없다. 귀는 쫑긋 세우거나 다소곳이 모을 뿐, 소리가 불쾌할 때는 손가락으로 틀어막는다. 귀를 감고 뜰 수 없다는 건, 감고 뜰 수 있는 눈보다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 하지만 귀를 찢는 아이 울음소리로 첨단 무기를 만드는 걸 보면 귀는 눈보다 덜 위험하지 않다.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 제 목숨 끊을 수도 있으니, 귀는 위험할 수밖에. 스스로 열고 닫을 수 없으니, 귀는 더 위험할 수밖에.

 

 

부모의 말 한 마디에 죽을 마음을 먹는 아이들도 있고,

연인의 말 한 마디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고,

그 사람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는 미담도 있다.

 

말 한 마디는 혀와 입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주워섬기는 것은 바로 귀다.

 

귀가 없다면 그것이 진주이든 독이든 들을 수 없다.

귀가 없다면 말은 마음에 가 닿을 수 없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을 영화로 만든 장면에는 어머니의 불륜을 알게 된 소년이 소리를 지르자 창문이 와르르 깨진다.

 

귀의 고막을 터트리는 전쟁 무기가 있다고 한다.

귀가 터지면 사람은 중심을 잃고 무너진다.

 

말의 독을 받아먹은 귀는 중심을 잃고 헤맨다.

귀는 사람을 바로 세운다.

 

좋은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은 중심이 단단하다.

그러나 늘 독한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은 휘청거리며 인생을 망친다.

 

좋은 말을 들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은 식물들은 건강하게 잘 자란다.

그러나 욕을 듣고 자란 식물들은 시들어 죽는다.

 

사람의 귀는 맑고 깨끗해야 한다.

독한 말로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나쁜 말, 유혹하는 말, 죄를 이끄는 말을 들었을 때

성현들은 귀를 씼었다.

 

귀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바이러스나 방사능보다 더 무서운 말들에.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듯

독한 말들을 막아내기 위해 귀마개를 구해 쓰자.

 

마음의 중심을 잡기 위해 귀를 아름다운 것들로 채우자.

24시간 열려 있는 귀에게 쉼을 주자.

 

(고흐처럼 귀를 자를 수는 없지 않는가.)

 

고요한 시간을 귀에게 선물하자.

 

오늘밤 잠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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