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상 <미래를 꿈꾸는 엔지니어링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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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권오상 <미래를 꿈꾸는 엔지니어링 수업>

by 브린니 2020. 10. 26.

현재 고등학생들은 문이과 통합 교육을 받지만,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여전히 고등학교에 문과와 이과가 나뉘어 있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을 문과형 인간, 이과형 인간으로 나누면서 살아왔다. 문과형 인간은 으레 수학적 센스가 없고 과학에 무디고 기계를 다룬다고 생각해왔다. 이과형 인간은 말을 조리있게 못하고 감성이 무딘 대신 고장난 물건을 고칠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융합 인재라는 말이 우리 귓가에 맴돌기 시작하면서 한쪽만 잘해서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다가왔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라는 신화적인 인물이 등장하면서 인문학적 소양과 과학적 소양이 융합되어야 미래를 개척하는 새로운 디지털 시대를 열어갈 있다는 비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래를 꿈꾸는 엔지니어링 수업> 문과형 인간으로만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전혀 없었던 과학과 공학의 미묘한 관계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또한 저자의 과학과 공학, 인문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의 융합을 따라가면서 어느 한쪽 분야의 통찰만 가지고는 없었던 새로운 인식을 있어 흥미로운 책이다.

 

서울대와 카이스트, 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기계설계와 공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처럼 책은 줄곧 과학과 공학의 대립 속에서 공학의 가치를 역설한다. 하지만 배경으로 설명하는 방대한 역사적, 인문학적, 과학적 지식은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저자를 신뢰하게 한다.

 

공학자로서의 프라이드도 있겠지만, 과학 이론이 정립되기 전에 먼저 공학에 의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같다. 과학은 적어도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에 의하여 이론이 정립되기 시작한 시점을 시작으로 꼽지만, 공학은 구석기인들이 돌도끼를 사용하는 순간부터 시작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공학은 쓸모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에 경험적이고 귀납적이고, 원리를 응용하는 것이라고 있다. 반면 과학은 논리적, 연역적인 방법으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한다. 하지만 보편적 진리라 믿었던 것에 대한 패러다임이 전환되면 기존의 진리를 부정한다는 과학의 맹점이 있다.

 

저자는경험적으로 입증할 없는 대상은 진정한 과학이 없다 하면서 공학의 도움 없이 과학 단독으로서 있는 일은 제한적이므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서술한다.

 

과학은 공학을 통해 이론을 현실에 유용하게 가시화할 있으며, 공학은 과학적 연구에 효용적 가치를 더해서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여한다. 저자는 공학이 기술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창조의 가치를 지니며 과학보다 예술에 가깝다고도 역설한다.

 

저자의 서술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바로엔지니어링이 영원불멸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엔지니어링이 건전함을 증명한다라는 부분이다.

 

학문이 건전하다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표현일까? 아주 재미있다. 저자는 과학이 종교의 자리로까지 올라갔다고 말한다.

 

과학의 진리가 절대적인 위치로까지 스스로를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매우 불건전하다는 뜻이다. 어떠한 진리가 절대로 바뀔 없는 영원불멸을 추구할 그것은 이미 학문이 아니라 종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세상의 고등종교들과는 다른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과학이 일종의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리로서의 과학이 형이상학이라면, 첨단과학이 만들어낸 많은 문명의 부산물들은 공학의 실제적 노력의 결과였다.

 

과학자는 많은 돈을 지원받아 비행기를 만들려다 실패했지만, 자전거 수리공이었던 라이트 형제는 비행에 성공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학의 대가로서 진정한 과학의 형이상학자였지만, 동시에 그는 특허를 여러 가지고 있었던 공학자이기도 했다.

 

마차를 모는 말들의 배설물 때문에 전염병이 창궐했던 더러운 유럽의 대도시에 자동차가 등장했을 , 석유 차와 전기 차가 동시에 개발되었다는 흥미로운 내용도 들어 있다.

 

전기 차가 여러 면에서 월등했지만, 많은 석유회사가 전국 각지에 주유소를 세우면서 석유 차가 대중화되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결국 공학과 자본의 힘은 떼려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학은 자본가의 이익을 창출해줌으로써 스스로 벌기를 자처하여 자금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었지만, 과학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정부 지원에 기대어 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기초과학은 마치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들이 자본가들에 기대어 있었던 것과 같은 상태에서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예술가들은 근대 이후에 공연이나 예술품을 대중에게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자급자족을 시작했지만, 과학은 아직까지도 당당하게 정부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물론 책에 대해서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다른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문과형 인간들에게는 이웃집 싸움 구경처럼 재미난 구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과형 인간이라는 말도 이제 구시대적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이상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시대가 왔다.

 

많은 컴퓨터가 기억해주고 우리는 검색만 하면 되는 편리한 시대이긴 하지만, 방대한 통찰력을 가지지 않으면 그것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런 좋은 도서들을 폭넓게 읽어 세세한 내용은 잊더라도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력 정도는 것으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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