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행숙 <새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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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행숙 <새의 위치>

by 브린니 2020. 11. 2.

새의 위치

 

 

  날아오르는 새는 얼마나 무거운지, 어떤 무게가 중력을 거스르는지,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털이 묻고,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

  나는 나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지. 나는 조심 같은 건 할 수 없고, 나는 노력 같은 건 할 수 없네. 오늘은 내내  어제 오전 같고, 어제 오후 같고,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오늘은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오늘은 발자국이 생기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지.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춥다. 춥다. 그러면서 땅만 보며 걸어다니네.

  눈 내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데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났다.

  우리는 눈 내리는 소리처럼 말하자. 나는 너한테 안 들리는 소리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를 두 손에 보듬고 걸어가야지.

 

  ―김행숙

 

 

【산책】

 

새는 중력을

거스르며 날아오른다.

새의 무게 중심은 가슴에 있고, 흉근이 발달해서 날갯짓을 하는 데 힘을 보탠다.

 

새의 가슴에는 공기 주머니가 있어 몸을 가볍게 하여 공중을 날 수 있다.

새는 날개 관절을 접고 펴면서 공기의 흐름을 조절하며 위아래로 움직이며 날 수 있다.

 

새의 뼈는 속이 비어 있다.

새는 바람을 타면서 바람과 함께 흐른다.

 

새는 공중을 날다가 나무에 앉아 쉰다.

새는 나무에 둥지를 튼다. 거기서 잠을 잔다.

 

그러나 새가 죽으면 땅에 떨어진다.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하늘을 나는 새도 죽으면 땅에 떨어진다.

 

아, 새의 무덤을 공중에 지을 수는 없을까.

평생 하늘을 날던 새를 땅에 묻다니!

 

 

새를 묻어준 기억이 있다.

 

죽은 새를 손에 들고 한참 동안 있었던 적이 있다.

 

새를 잡으려고 새총을 만들고 하늘을 향해 쏜 적이 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를 왜 땅에 떨어뜨리려고 했을까.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털이 묻고,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 오늘은 발자국이 생기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지.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춥다. 춥다. 그러면서 땅만 보며 걸어다니네.

 

새가 날면 하늘을 쳐다보지만 눈이 내리면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걷는다.

눈이 내린 세상이 너무 하얗고 순결해서 땅에 발자국을 새긴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

나는 나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지. 나는 조심 같은 건 할 수 없고,

 

눈이 내리는 날, 연인들은 서로의 품에 얼굴을 묻고 서로의 몸을 껴안고 길을 걷는다.

눈이 내리는 동안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눈을 맞은 하얀 벤치가 있지만 앉을 수 없다.

 

눈 내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데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났다.

 

빗소리만 들어도 비가 내리는 걸 알 수 있다.

눈은 소리가 없다. 밤새 눈이 와도 알 수 없다.

 

눈은 침묵한다.

눈을 덮어 쓴 세상도 고요하다.

 

인간만이 눈 위에 발자국을 내며 소리를 만들 수 있다.

발자국으로 음표를 그릴 수 있고, 발장난으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시 속의 연인들은 조용하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우리는 눈 내리는 소리처럼 말하자. 나는 너한테 안 들리는 소리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처럼, 내리는 눈처럼 고요하게 침묵 속에서 걸어간다.

 

죽은 새를 두 손에 보듬고 걸어가야지.

 

눈 속에 죽은 새를 장례하듯이 연인들은 침묵 속에서 걸어간다.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가벼운 사랑은 좀 더 무거워지고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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