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심연들 >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파스칼 키냐르 <심연들 >

by 브린니 2020. 10. 17.

심연들 Abimes

 

 

심연이란 바닥을 알 수 없는 밑바닥이다. 끝에 도달할 수 없고, 계속해서 밑으로 빠져들기만 하는 것이다. 그곳은 가 닿을 수 없는 장소이다. 어쩌면 장소가 없는 어떤 곳일 뿐이다.

 

사람들은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곳을 시원이라고 최초이자 태고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존재의 기원 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심연을 들여다 보라고 말한다. 그곳에 자신의 진짜 모습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과연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어떻게 보면 심연이란 없는 어떤 곳인데……

 

없는데 있는 것. Noting or Something. 아니 Noting as Something!

 

심연은 분명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없다.

없는 게 아니라 텅 빈 곳이다.

 

텅 비어서 계속 되는 것, 그것이 심연이다.

 

<심연들>을 번역한 류재화는 키냐르가 수많은, 정의할 수 없는, 한정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심연들을 총칭하고 정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깊은 바닷속, 빛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심해, 바닥없는 우물, 고통 어린 그녀의 얼굴,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자의 그 살랑거리는 눈 속, 생사의 갈림길, 뒷생각이라곤 전혀 없는 까만, 착한 동물의 눈, 홀리기 위해 제 스스로를 홀리는 드물게 찾아오는 무아지경의 순간, 그리고 독서.

 

<심연들>은 책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상관없다.

 

<심연들>에는 시작과 끝이 없고,

연대기적인 스토리가 없다.

 

이야기가 시작해서 진행되고, 절정을 맞이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식의 구성이 없다.

심연들은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시간을 부정한다.

 

심연들은 시간의 양항(兩項, deux termes)의 오고감뿐이다.

 

키냐르는 과거 현재 미래하는 익숙한 시간의 3분법을 지우고, ‘지나가서 잃은 것’과 ‘임박한 것’이라는 두 항 체계로 줄인다.

 

카냐르는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 “역사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간을 일정 방향으로 개념화한 보잘것없는 건축물”일 뿐이다.

 

키냐르는 근원의 문제에 강박적일 정도로 천착하며 과거, 태고로의 역행한다.

 

또한 그는 미리 설정된 궤도를 떠나 배회하는 것을 즐긴다.

배회는 목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산책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산책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배회는 그저 오고갈 뿐이다.

 

키냐르의 책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글들에는 이야기가 단순히 반복되지 않고,

하나의 테마가 여러 가지 패턴으로 변화하는 음악적 변주가 스며들어 있다.

 

성서의 노아의 방주에는 일정한 수의 동물들이 두쌍씩, 일곱쌍씩 들어가지만

그의 글(방주)는 무분별로 여러 가지 주제가 여러 개로 변주된다.

 

그는 유일한 가치가 지배되는 세상을 가장 싫어한다.

 

<심연들>은 키냐르가 기획한 『마지막 왕국』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모든 것이 획일화되고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독재가 횡횡하는 이 시대는 대홍수와 같은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느끼고 『마지막 왕국』을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설계했다.

 

그가 노아의 방주에 싣고자 하는 것은 “무신론적인, 무국적적인 사고, 공요하는 생각, 불안한 성(性), 비이성, 비직선적, 비방향적 시간, 비기능적 예술, 비밀, 척도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자연 같은 것들”이다.

 

키냐르는 표준화되고, 세계화되고, 획일화된 집단 모델을 강요하는 오늘날 사회에 대해 회의懷疑한다.

 

의심의 시대를 사는 작가들에게 언어는 더 이상 의미를 이데올로기를 실어 나르는 매개체가 아니다. 언어는 세계를 재현할 수 없을뿐더러 언어와 세계는 이미 이질적이다. 언어의 힘은 세계를, 자연을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무력함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키냐르는 언어가 희생물, 제물이 되어 완전 연소되는 지경을 찬미한다.

 

키냐르는 사전에서 딱 맞게 정의되는 단어보다 “덜 지정되는 것, 형용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 더 미분된 것, 더 해체된 것, 더 티끌 같은 것”을 좋아한다.

 

그는 이미 정의된 것을 자기식의 언어로 재정의하면서 언어의 의미를 더 확장한다.

 

아름다움과 슬픔의 심연은 구분되지 않는다. (심연들,154p)

 

류재화는 독서는 심연에 빠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독서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고 뛰어들어야만 하는 깊은 세계,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세계이기 때문이다.

 

특히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읽는 일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