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병률 <나비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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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병률 <나비의 겨울>

by 브린니 2020. 10. 18.

나비의 겨울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누군가 내 집에 있다 갔다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누군가는 내 집에 살다 갔는데

나는 집이 싫어 오래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번 기웃거렸다

 

누군가 다녀간 온기로 보아

어쩌면 둘이거나 셋이었을지도 모를 정겨운 흔적 역력하고

문이 그대로 잠긴 걸 보면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서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이병률

 

겨울을 넘어온 나비

 

【산책】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이런 도둑도 있다.

남의 집에 들어와 내 집처럼 천역덕스럽게.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도둑이 허기를 채운 것까지는 이해되는데

남의 집 화초가 죽어가는 것을 안쓰러워하는 것은

정말 선을 넘었다.

 

나는 집이 싫어 오래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번 기웃거렸다

 

이 집의 주인이 내게도 뭔가 사연이 있다.

왜 이 집에서 사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왜 죽을까 살까를 고민하며

죽을 곳을 찾아 다닌 것일까?

(시의 뒤편에 답이 나올까?)

 

온기

정겨운 흔적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그런데 그 도둑이 다녀간 뒤로 집안에는 온기가 돈다.

정겨운 흔적까지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뜻밖의 방문을 한 번으로 끝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정말 불을 놓았을까?

이 불이 정말 실제 불일까?

 

어쩌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이 아닐까?

 

사랑에서 오는 불?

아니면 사랑의 배신에서 오는 불?

 

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슬픔의 불?

불은 불인데 집을 태울 수 없는 미약한 촛불?

 

집을 태우지 못하고 간신히 자기 자신만 태울 수 있는 불

마음을 태우다 눈물로 끄는 여리디 여린 불!

 

누군가 내 집에서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화를 냈다가 침착했다가

감정은 널을 띠고 마음은 열정과 냉정을 오고 간다.

 

여기서 무엇을 어찌할까 모른 채

불을 피웠다가

아닌 척

얼음을 놓는다.

 

마음의 흔들림,

마음의 요동침,

마음의 진짜 감정은 어떤 것일까.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그(그녀)의 마음의 감정은 슬픔일까?

 

머리를 풀어

오히려 용서를 비는 걸까?

 

무슨 잘못을, 무슨 죄를 지었을까?

 

배신한 사람은

떠난 사람은,

내가 오히려 그(그녀)였던 것일까?

(그래서 내가 죽을 만큼 괴로워 집을 떠난 것일까?)

 

떠났던 사람이 돌아와

밥을 짓고, 화초에 물을 주고

집에 불을 놓고, 그 자리에 얼음을 놓는 것일까?

 

초를 켜고

집에 불을 놓은 대신

슬픔의 눈물처럼 초를 켜고

무언가를 비는 것일까?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문고리를 잡고 우는 것일까?

열리지 않는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일까?

마음의 문이 열리기를 빌면서 우는 것일까?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밥을 짓고 화초에 물을 주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사람

 

어쩌면 내 마음의 집에도 들어왔던 사람

아마도 그러나 떠났던 사람

 

그 사람이 내가 없는 날 동안

내 집에 들어와

나와 살듯이

밥을 짓고

화초에 물을 주고

불을 내고 얼음을 놓는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진짜 일어난 일일까?

 

아니면 내 마음에서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오는

나의 환상일까?

 

그 사람이 진짜 돌아와 다시 내 집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나와 함께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나는 내 집을 열 것인가?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내 마음의 집으로 맞이할 것인가?

 

나는 그(그녀)와 함께 살 것인가?

 

정녕 인생은 알 수 없는 어떤 비밀의 집에서 사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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