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오스 깝사니스 <신화 神化 Theo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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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게오르기오스 깝사니스 <신화 神化 Theosis>

by 브린니 2024. 3. 3.

<신화 神化 Theosis, Deification, Divinzation>

게오르기오스 깝사니스 수사대사제

 

 

 

 

신화의 뜻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신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이다하고 떠들어대는 이단, 사이비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 자체를 입 밖에 꺼내지도 않고 그런 말을 들으면 귀를 씻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불교 신자들이 성불하십시오, 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성불 성불이란 곧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화와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을 볼 때 저 사람은 살아 있는 부처다, 라는 말도 듣습니다. 이런 말들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처럼 된다거나 살아 있는 예수라는 식의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잇는 가교 역할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은 예수님이니까 가능하지, 우리는 못 해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인간의 한계를 규정짓고 그 틀 안에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선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감히 하나님이 된다거나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 의무나 다하면 그뿐이라는 식의 다소 율법적인 신앙, 최소한 양심을 지키며 살자, 라는 식의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역시 교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곧 교회 생활로 여기고 교회 잘 출석하고, 십일조와 헌금을 잘 내고, 각종 예배와 모임에 열심이고, 성경공부나 수련회, 제자훈련 등에 참여해서 은혜받으면 그만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학교나 직장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거나 성경에 대해 배우면 학교이고, 교회의 행사나 각종 봉사에 참여하면 직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의무를 다 하듯 교회 생활을 합니다.

 

의무를 다하는 것은 결국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다 완성하신 율법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교회 생활을 잘하고 있기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군가 당신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물으면 고민에 빠집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거듭나는 것, 거룩한 것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가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신화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를 담임하셨던 옥한음 목사님은 구원이라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설교하셨습니다. 옥한음 목사님을 존경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만 그분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대부분 잊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구원이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사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면서 더 이상 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죽어서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신화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하는 첫걸음이자 그 질문의 해답으로서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이 책은 신화(Deification, Divinzation)’에 대한 신학적 근거와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신화가 우리 삶의 목적이라고 제시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육화(그리스도의 성육신)’사람의 신화의 원인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신화에 대한 신학적 근거와 역사를 설명하면서 교회가 사람의 신화되는 장소임을, ‘신화는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신화의 자격조건신화의 경험’, ‘많은 사람들이 신화에 실패하는 이유신화를 향하는 신앙 지도의 결과들, ‘신화를 이끌지 않는 신앙 지도의 결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신화에 대한 구절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의 목적

 

하느님은 사람이 은총으로 신화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 모습을 타고 났기 때문에 사람은 닮음이 완성되기를 요구받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사람에게 은총으로 신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이 영적 선물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를 닮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외면적, 도덕적 관계를 넘어서서 창조주와 직접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신화입니다. 이것은 외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이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하느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성육신

 

사람을 신으로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인간으로 되셨다.”(아타나시우스)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느님께로 다시 향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 새로운 뿌리, 새로운 사람이 바로 하느님이며 동시에 사람이시고 하느님 말씀이요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근원, 새로운 시작, 인류의 새로운 누룩이 되시기 위해 육화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을 가진 하나의 그리스도를 가집니다.

 

자신의 위격 안에서 두 본성을 결합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느님-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 본성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하느님 본성과 연합됩니다.

 

주님의 육화 후에 우리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죄를 지었든지 상관없이, 우리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분리했는지 상관없이, 회개를 통해서 하느님과 다시 연합하기를 바라기만 한다면 그 연합에 성공적으로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연합할 수 있고, 따라서 은총으로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우리의 무가치함과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우리를 그의 몸에 포함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 자신의 지체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기를 얻고 구원받고 신화딥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친교를 위한 사람의 신화를 위한 유일한 장소, 오직 교회 안에서만 사람은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거룩한 하느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창조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고 앵복이고 충만함입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와 대화할 때 그의 존재를 느끼고 즐기게 되는 것처럼, 사람과 하느님과의 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외면적 관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의 신비로운 연합니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화의 자격조건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가 배제된 그 무엇도 우리에게 주시길 원치 않으십니다. 동시에 신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까닭에 거룩한 교부들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신화를 이루어간다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신화 안에서 하느님이 행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겸손

 

겸손이 없다면, 우리 삶의 목적이 우리 자신 바깥에 있다는 것, 즉 그것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겸손해져서, 자신의 인간적 연약함과 인간적 병듦을 알아야 하고, 도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신화의 길 위에 있으려면,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해야 합니다.

 

금욕주의

 

겸손을 얻었다면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깨끗해지기 위해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명을 실천하고 회개와 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의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금욕적 수행을 시작합니다. 거룩한 교부들은 하느님은 그분의 계명 속에 그분 자신을 숨겨 두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계명을 지킬 때,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연합합니다.

 

진정으로 깊게 회개하고 덕들을 얻기 위해서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이 하는 투쟁에 우리 심장의 피를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신비들(성사들)

그리스도는 거룩한 신비들 즉 세례성사, 성유성사, 고백성사와 거룩한 성체성혈성사(성찬예배)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하십니다,

 

하느님은 함께 살아가고 함께 인격적 친교를 나누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그래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분이십니다.

 

 

신화의 경험

 

신화의 경험은 사람의 정화淨化에 비례합니다. 욕망으로부터 깨끗해지면 깨끗해질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더 높은 체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평정平靜을 얻게 됩니다. 기만적인 욕망이나 죄로 향하는 연약함이 없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평화로워지며 자만, 증오, 양심 그리고 육욕으로부터 행방됨으로써 모든 외적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완전하게 깨끗해지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때 그때야말로 가장 위대한 하느님 은총의 경험이 사람에게 가능해집니다. (테오리아, 하나님을 보는 것)

 

가장 위대한 경험은 바로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빛을 보는 일입니다. (제자들의 변화산 경험, 바울의 삼천층 경험)

 

교회에서 우리는 신화의 은총을 우리 영혼뿐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향유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몸 안에 머물면서 영혼과 함께 이 몸의 투쟁을 공유하기 때문에, 몸 또한 확실히 영광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항상 신화의 체험, 그런 영적인 체험이 아니라면 분명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도라는 교회적 영성을 얻게 되고,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분투가 우리 하느님과의 연합느오 인도해주는 것임을 확인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화의 특별한 무대는 수도원입니다. 이곳에서 수도사들은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과의 연합에 대한 높은 경지의 체험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의 지체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하느님과 교제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서로 친교를 누린다는 것은 교회의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 전체를 통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겸손과 회개와 기도와 거룩한 신비들을 통해서 천천히 거룩하게 되고 신화될 것입니다.

 

 

신화를 향하는 신앙 지도

 

우리가 신화를 향하여 투쟁할 때 우리가 서로를 미래의 신으로 바라볼 때 우리 이우ᅟᅮᆺ을 대하는 태도는 더 훌륭해집니다.

 

우리가 자기애아 이기심이라는 인간중심적 철학을 극복할 때,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되고 진실한 인간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흠숭과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또한 우리 이웃을 쾌락과 착취의 도구로 보는 게 아니라 신화로 정향된 하느님의 한 형상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은 존경과 참된 존귀함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화는 은총으로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단어로는 양자養子, 구속救贖, 상속inheritance, 거룩함 holiness, 완전perfection 등이 해당된다.

신화는 성령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신화는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사랑의 행위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시작하는 것으로 정지된 것도 완성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원히 끝없이 지속되는 영적 상승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신화>를 읽고 난 뒤 생각

 

신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 생활에 골몰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하늘 위로 올라가야 할 것처럼 여겨지니까요. 물론 영적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신화로 가는 지름길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경건하고 거룩한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경건하고 거룩한 것이냐 묻는다면 우리의 눈은,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여기고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결코 신화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델은 언제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본체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고, 땅에서도 가장 낮고 천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우리 그리스도인도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화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고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면은 독수리처럼 올라가는 것일지 몰라도 우리의 눈과 말과 행동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하나님이 아닌 이웃으로 향해야 합니다.

 

변화산의 빛나는 영광이 아니라 어둡고 추운 곳에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며 오히려 영적이지 않은 것 같은 노동이나 허드렛일, 낮고 천한 일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책은 신화에 대한 이론적인 기초를 다지는 책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에로스로 정의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에로스가 아니라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천상의 신들의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는 그리스신화와 그리스철학의 사랑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로스는 인간의 육체적인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고대와 중세 신학에도 도입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말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안나스 니그렌이 <아가페와 에로스>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죄인이 우리 인류를 향한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사랑입니다. 죄가 있더라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천상의 에로스는 하나님이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기에 연모하는 사랑이며, 에로스를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높은 곳을 바라보며 이웃을 볼 때에도 이웃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을 보며 친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에로스는 좋은 것을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아가페는 나쁘거나 죄가 많거나 아름답지 않아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신과 같은 이웃을 사랑하는데 반해 아가페는 신이 버릴 정도로 죄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가페는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에로스로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로서 서로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역설적으로 하나님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니까요.

 

하나님에 대한 열망 즉 에로스가 가득 차면 우리는 종교적 황홀경을 경험할 수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변화산의 경험처럼 한 번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회개하면 눈물을 쏟으면서 회개하며 죄로부터 돌아섰을 때의 기적 같은 변화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은혜라고 정의하면서 이런 은혜를 또 경험하기 위해 기도원이나 수련회나 영성캠프를 찾아 돌아다니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영적 경험들, 즉 은혜라고 부르는 충만한 감동은 우리를 종교적 황홀경으로 이끌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아가페를 이웃과 나누는 고난을 통한 은총으로 데려가 주지 못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둘째치고, 가족끼리 화목하고, 부부가 사랑하고, 학교, 직장,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난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어떤 영적 경험이나 영적인 지식으로 된다고 생각해서는 오산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면서 그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없고서는 우리는 신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인 결합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몸이 고생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겪으셨던 모든 고난과 함께 하는 일에서부터 우리는 신화를 조금씩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신화가 교회 안에서만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지체로서 올바르게 기능하고 있다면 맞는 말이 될 수 있지만 현재 우리 교회의 모습이 진정 그러한가, 따져보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론적으로 볼 때 우리가 신화되는 것은 교회 안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성도의 모임인 교회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에만 머무르는 앉은뱅이 신앙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학교와 직장, 사회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 자체로 화목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말고 세상의 낮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진짜 모습으로 살면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생시몽은 그의 책 <새로운 그리스도교>에서 교회는 빈곤층의 도덕적 물질적 이익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 주위에서 발견하는 어려운 이웃들을 최선을 다해 돕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일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서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신화란 몸과 분리된 영적인 경험이나 지식을 통해 가능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전인격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신화의 자격조건이란 항목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신화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겸손, 금욕주의, 거룩한 신비주의 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교회중심적이며, 율법적일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인간중심적입니다.

 

겸손의 경우 신화를 알기 위해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이 없다면, 우리 삶의 목적이 우리 자신 바깥에 있다는 것, 즉 그것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인생의 목적은 우리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신화가 가능합니다. 우리 밖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내 속에 있으며 동시에 우주 전체에 충만해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나의 겸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으로 스스로를 낮출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노력으로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림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나의 자아를 내려놓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겸손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내가 겸손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내 속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이루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내가 행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신비이며 역설입니다.

 

 

금욕주의 역시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나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요? 의인 욥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오직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나의 이기심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금욕주의를 사막에서 실천하는 수도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의 내면까지 완전히 비웠을지 의문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은 앉아서 생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웃들을 사랑하는 행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로 이웃들을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을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이웃에게 양보하고 배려하고 친절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이기심과 욕망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이것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일하실 때 가능합니다.

 

 

또한 이 책은 거룩한 신비주의, 곧 교회에서 행하는 성사들을 통해 신화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일주일 동안 죄에 빠져 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잠언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난 뒤 곧바로 죄에 빠지는 성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잠언7:14-22). 거룩한 예배만으로 우리가 신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화는 우리 온 삶과 인격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신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 하신다, 라고 여기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서 죄와 세상과 자기 욕망과 이기심과 싸우면서 부단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혹은 노력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도록 돕는 분 혹은 주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내 속에 사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하는 모든 선한 것은 모두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나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좋은 밭이란 씨가 뿌려졌을 때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결실을 맺을 토양을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은총이 임하려면 우리는 항상 좋은 밭의 마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밭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아가페로 물들어 있다면 우리는 이웃을 도와야 할 때, 즉 강도 만난 사람과 맞닥뜨릴 때,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의 선하심에 의지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가 이미 좋은 밭이었다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알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역설의 종교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나도 모르게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내 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다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밖에서 기적이 일어났을 때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의 행위를 했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나의 바깥에서 일어날 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것이 나를 통해 일어날 때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이 제자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스스로 체험한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삭개오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도왔습니다. 세리가 가난한 자를 돕다니요. 이것이 기적이며 삭개오가 스스로 기적을 행했을 때 예수님이 그와 그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기적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분량을 넘어서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 한계를 넘어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성취하신다는 뜻입니다.

 

신화가 은총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우리는 몸소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때 은총으로 인한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진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에 동참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지, 영적으로 고양되어 변화산에서 초막을 짓고 거룩한 신비(예배나 성사)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은 신화를 위해 사막이나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하는 때가 아니라, 예배를 사수하겠다고 교회에 모일 때가 아니라, 흩어져서 각자 맡은 곳에서, 학교와 직장과 사회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썩어 밀알이 되는 일에 헌신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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