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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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by 브린니 2024. 1. 1.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는 팬데믹이 일어난 상황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왜 팬데믹이 일어난 것일까, 의문이 생겨나는 순간 그렇다면 이런 팬데믹이 일어난 지금 이 세계는 대체 어떤 세계인가라는 질문이 잇따라 오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니 이 질문을 더 심화하기 위해, (질문이 깊어져야 그 해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므로) 논의를 진행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세계가 팬데믹에 취약한 것 못지 않게 이미 구조적으로 차별주의적 구조이며 인종과 경제, 정치적으로 사람을, 한 생명을 차별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비판을 늦추지 않는다.

 

버틀러는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문제를 더욱 부각시키면서 논지를 펼친다. 결국 버틀러는 현재 이 세계가 구조적으로 차별을 조장하고 있으며 팬데믹으로 인해 차별의 최하위에 있는 약자들의 폐기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약자들을 생명의 차원에서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 기초의료보험이나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서문

 

서문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공동(共同, the common)은 우리가 아직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세계 주요 자원들의 상당수는 공정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 세계의 그저 작은 몫만을, 혹은 그 세계의 이미 사라진 부분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무에, 중첩되어 있는 수많은 세계들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러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인지하지 않고서는 팬데믹을 세계적 현상으로서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불공정한 분배 세계에서 작은 몫, 이미 사라진 부분만을 갖게 되는 존재들이 있기에 팬데믹은 이런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팬데믹이 우리 세계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세계적 현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공동들 외부에 존속하고 있는 삶의 지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이를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 묻고 있다.

 

버틀러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 세계가 마치 불필요한 부분으로 여기며 제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대체 가능한 노동을 구성하고 있거나 자본주의적 기준에 의해 인정되는 생산성의 영역 외부에 살고 있는 이들은 아마도 쓰레기, 즉 공동 세계의 폐기물로서 여겨지거나 범죄의 영역으로, 흑은 혹은 유색인종의 삶으로, 대로는 빚에 허덕이는, 아니 채무자의 삶에 전적으로 스며들어 그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사실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떠안고 살고 있는 삶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들은 지하공동체로서 존재하며 이에 속하는 서로 인접하고 중첩된 세계들이 있다고 말한다.

 

지하공동체는 경시와 범죄의 지대이지만 충분한 재정적 지원 없이 피난처가 만들어지고, 공동체와 예술에 대한 실험이 시행되며, 긍정의 행동들이 이루어지는 지대이기도 하다.”

 

버틀러는 공동에 참여할 수 없고, 참여가 결코 가능하지 않았거나 혹은 더는 가능하지 않은 이들에 대하여 세계의 지분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공정한 수단은 결코 없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것, 즉 시장가치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 말이 아니다.

 

 

버틀러는 팬데믹이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삶의 일부이며, 현재 그리고 아마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간 동안 이 세계의 일부분이게 될 전지구적인 유병 가능성, 잠재적인 고통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팬데믹을 맞이한 어떤 지역도, 경계 너머의 그 어떤 존재도, 아니, 그 어떤 독립된 신체도 결코 사전에 면역을 갖출 수 없다.”

 

그러므로 팬데믹이란 단순한 유행병도, 어느 지역의 풍토병도 아니며 우리 세계가 자체가 함께 맞이한 공동의 문제인 것이다.

 

이에 주디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밖에 없다.

 

팬데믹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란 대체 어떤 종류의 세계란 말인가

 

팬데믹을 통해 아마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 오직 우리 중 일부만이 접했던 무언가, 이미 세계 속에 언제나 잠재해 있던 무언가가 전격적으로 드러난 듯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하이데거의 생각을 근거로 팬데믹이 일어나고, 그 펜데믹을 통해 세계의 불평등한 구조(약자가 더욱 더 소외될 수밖에 없는) 세계상 앞에 선 주체는 그 주체가 알고자 하는 세계로부터 제외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펜데믹 현상을 두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스스로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추정함으로써 위안을 느끼는 상황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감각

 

버틀러는 어떤 조건 하에서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계로서 나타나는가? 하고 묻는다.

 

버틀러는 셸러의 비극적인 것에 대한 통찰을 빌려 비극적인 것은 상실에 대한 비탄 속에서뿐만 아니라 셰계가 그러한 사건이 정말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충격 혹은 당혹감 안에도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팬데믹을 통해 볼 수 있는 비극적인 것은 그저 이 사건, 이 상실, 혹은 이 가치의 파괴가 아니라 그러한 파괴가 가능한 셰계 혹은 그러한 파괴가 가능해진 세계라는 것이다.”

 

접촉

 

표면들과 우리가 숨 쉬는 공기로 이루어진 세계는 생명 그 자체를 지탱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팬데믹은 누군가를 만지는 것, 그들이 내쉰 숨을 들이마시는 것, 예기치 않게 가까이 있는 것, 낯선 이의 즐거움에 찬 외침이나 흥겨운 노래, 혹은 너무 가까이서 춤 추는 것 등에 대해 걱정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산다는 것, 여러 생명체들 중의 하나로서 산다는 것, 생명의 과정들 중의 한 생명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팬데믹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래하는 책임감을 부추긴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실존 선언을 연상케 한다.

한 사람은 한 사람과 안부를 묻고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이것이 팬데믹 하에서는 죽음을 선물하는 것과 같다.

서로에게 책임 있다는 것은 서로를 피해 달아나야 하는 역전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아래 같은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거주 가능한 세계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살 만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메를로 퐁티 상호주관성 상호엮임

 

내 삶은 어떻게 그리고 언제 처음 독립된 삶으로서 여겨지는가

 

모든 개체화는 마치 그것이 극복 가능한 것인 양 혹은 이미 극복된 것인 양 상상되는 의존성에 사로잡혀 있다.”

 

나 자신의 삶을 살 만하도록 만드는 것의 일부는 다른 삶을 살 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의 안녕의 문제를 타자들의 안녕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일이다.”

 

살기 위해서 나는 살아가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과 다른 존재들을 요한다.”

 

내가 제안하는 바는 이 삶은 내가 시작하기도 전에 그리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도 전에 이미 여러 다른 존재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타자들은 나보다 앞서 존재하며 어느 정도는 나를 이미 기다리고 있다. 그리거ㅗ 그들의 존재가 보여주는 초기 효과들, 말하자면 사랑의 침범 작용은 결국 나라고 스스로를 지칭하게 될 이 사람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나는 타자들의 지지와 그들과의 동행이 없이는 삶의 과정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살아 있는 생물들이 의존하고 있고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기제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위의 진술들은 타자의 철학에 대해들은 분들이라면 모두 공감하는 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궁극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 즉 타자의 시선에 언제든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나비효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의 행위는 타자에게 영향을 미치며 역으로 타자의 모든 것이 내게 영향을 준다.

 

서로는 서로에게 얽혀 있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이러스의 유행에 의해 특정한 생명과 삶의 조건들은 헐벗은 것이 되어버렸기에, 우리는 이제 지구와 그리고 서로와 맺는 관계를 지속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를 자기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세계의 파괴 그리고 계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들의 파괴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집단적인 결기를 요구하는 이 세계와 함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로서 이해하는 기회를 즉 비극적인 것에 대한 궁극적인 감각을 갖게 되었다.”

 

팬데믹 시대 특정한 존재들의 삶은 경계 바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우리가 서로에게 맺는 관계는 분리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로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즉 안과 밖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를 파괴하는 얽힘 속에 놓여 있다.

우리가 조르즈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 상태를 만들려고 해도 경계 밖에 있는 혹은 지하에 있는 존재들은 우리와 서로 얽혀 결코 분리될 수 없고, 팬데믹 상황에서는 좋든 싫든 공동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의 권력들 생활의 제약에 대한 단상

 

팬데믹 시대 삶과 노동의 경향들

 

팬데믹 시대에 노동자들은 이중적 질문 앞에 서 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를 죽게 하더라도 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

 

이미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자는 살 만한 삶을 위한 환경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가깝게 다가가거나 혹은 죽는다는 것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하락을 걱정하면서 노동자들이 경제 일선으로 복괴해야 한다는 주장은 견실한 경제가 인구의 보건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이들은 이윤과 부가 결국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믿음을 지지하는 이들이다.”

 

어떤 이들은 죽어야만 한다고 여기고 그러나 위험성을 계산하고 있는 이들은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경제를 위해서 결국 인간의 생명이 희생될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정책 결정자들이 2021, 2022년에 경제 재개에 드는 비용을 추정했을 때 그들은 이 결정으로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고, 질병과 죽음에 불균형적으로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은 바로 적절한 의료보험 혜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들이라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구조적 형태의 인종차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없어져도 될 만한가? 누구의 생명이 없어져도 될 만한가? 누구의 생명이 처음부터 결코 보호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가?”

 

근무조건이 위험하더라도 임금을 벌기 위해서는 일해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시스템아래에서는 노동자가 경제적 결핍과 심각한 질병 중 한쪽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국가기본소득이 매우 절실히 요구된다.

 

신체적인 삶은 실제로 무엇이 삶에 필요한 것들인지 밝혀주는 표상들에 의존하고있으며 이미 살아 있는 존재들 사이의 근본적 불평등이 생활 세계의 일부였다.

 

이러한 생활 세계에서는 어떤 삶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죽음으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하고, 다른 삶들을 보호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아니 비용을 치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 버틀러의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 세계의 미래들

 

상호 얽힘

 

팬데믹은 이 세계에서 거주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거주 가능한 세계에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생명을, 생명체들을, 그리고 서식 및 생활 환경들을 폐기해버리는 권력들에 맞서는 투쟁을 시작한다는 것과도 같다.”

 

팬데믹으로 인해 세계의 상호의존성이 강화되었고, 공동체 속에서 각각 독립된 신체들 속에 고립된 개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하나의 신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관계를 넘어서 다른 살아 있는 생명체들, 표면들, 모두의 것인 공기를 포함하는 여러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윤리와 정치로서의 상호 엮임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메를로퐁티에게 인간 생명체는 신체적 존재로서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동시에 세계는 우리 안에, 우리 위에 새겨진 객체들 안에 존재한다.”

 

타자와의 관계성은 개인 주체를 확립하기도 하고 동시에 해체하기도 하는데 호혜성이란 윤리적 책무와 사회 평등의 차원에서 요구된다.

 

신체와 감각의 수준에서 우리의 삶이 서로의 삶에 연루되어 있다.”

 

내가 하는 것, 나의 행동은 언제나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것과의 관계를 통해 일종의 타자로서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윤리와 정치는 이런 관계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 속에서 생명이 스러지거나 파괴될 때 혹은 죽음을 예방할 수 있음에도 생명이 죽도록 내버려둘 때 가치의 파괴가 일어나는데 여기서 파괴되는 가치는 삶의 가치이다.”

 

삶에 대한 정치나 윤리가 공리주의를 채택한다면 그것은 그저 어떤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그저 죽게 내버려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이들에 대한 애도 가능성

 

주디스 버틀러는 누구의 삶이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하고 묻는다.

 

우리는 영웅적 삶을 살았다거나 공적이 뚜렷한 사람들이 죽었을 때 이를 애도하고 추모한다. 이것은 매우 공적인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척, 친지 몇 사람의 애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마저도 불가능한 경우도 많이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세계, 자본주의식 경제는 어떤 이들의 생명은 보호하고 다른 이들의 생명은 보호하지 않도록 조직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누군가가 애도 불가능하다는 감각을 갖고 산다는 것은 그가 폐기 가능한 이들의 계급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공연하게든 암묵적으로든 어떤 집단이나 인구들 애도 불가능한 것으로서 지정하는 것은 그들이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그 죽음에 따르는 대가도 없이 죽게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별적인 애도 가능성에 의해 확립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제도적 폭력의 한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애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박탈된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애도의 차원에서만 논의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죽어도 그만인 사람들로 분류되는데 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팬데믹 상황이 이 세계의 약자들의 폐기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는 것을 걱정한다.

 

죽음에 가까운 병에 걸린 자, 인종차별 대상자, 경제적 약자, 성소수자 등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정치 권력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죽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거나 이들을 살리는 것과 버리는 것에 대해 비용을 산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인간의 생명은 그런 식의 비용 계산의 대상이 아니며 생명과 삶의 가치가 파괴되는 세계는 거주 가능한 세계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버틀러의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며 팬데믹 시대에 새롭게 야기되는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이 이런 문제들을 더욱 심화하며 설령 팬데믹을 지나고 나서도 이런 경향은 점점 더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한편 팬데믹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의 조건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엮여 있다는 사실이 새삼 더 드러났기에 이번 기회가 우리가 공동이라는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국가권력이나 경제체제의 차이와는 별개로 서로 돕고, 정치, 윤리적으로 모든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대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디스 버틀러는 인간 생명이 어떤 사회 비용으로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팬데믹이 어느 정도 진정된 현재(20241), 우리는 팬데믹으로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기보다는 팬데믹으로 무너졌던 경제를 더 걱정하고 있으며 앞으로 겪게 될 우리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전망하는 일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앞으로도 팬데믹으로 야기된 인간의 생사 문제와 경제 비용을 저울질하는 일은 이 세계가 감당해야 할 윤리,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인간 생명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더 존중하더라도 이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경제 비용이 더 많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자본주의식 체제를 유지하는 한 이 두 가지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 서로 얽힌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에 대해 재발명된 공산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래전 생시몽이 인민의 경제와 도덕을 위해 교회가 이바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이미 구조적으로 거의 허물어지지 않는 체제를 갖고 있는 이 세계를 변혁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기초의료보험(우리나라는 이미 실시하고 있지만 미국은 의료비가 매우 비싸다) 강화와 기본소득(우리나라에서도 논의되고 있는 정치 주제이다) 실시 등은 현재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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