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없다 (3) : 진짜 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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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없다 (3) : 진짜 교회 2

by 브린니 2024. 2. 11.

교회는 없다 (3) : 진짜 교회 2

 

 

코로나가 터지자 느헤미야 형제는 깊이 생각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각종 모임들이 열릴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사이비종교집단에서 대규모로 감염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성도들의 모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며칠 동안 고민을 거듭하면서 주의 뜻을 찾고 찾았다.

 

느헤미야 형제가 얻는 결론은 이랬다.

지금이야말로 진짜 교회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느헤미야 형제는 대규모 집회 대신 가정예배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믿었다.

주일예배를 비롯해 모든 예배는 가족 중심으로 집에서 드릴 수 있도록 했다. 한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아빠, 엄마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눈다. 말씀은 각자가 준비해온 성경본문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참뜻을 구한 뒤 일주일 동안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한 뒤 각자 실천하고 느낀 바를 다음 시간에 나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읽고 그 중에서 본문 말씀을 정하고 이를 가족들과 나누는 것이다.

 

예배는 목회자가 준비하고 성도들은 구경꾼처럼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골라온 성경본문과 찬양과 기도의 제목들을 서로 나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도 모두가 예배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어려운 분들은 소그룹별로 묶어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목회자를 요청하는 그룹은 부목사와 전도사들이 함께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성도들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 말씀에 대해 어떤 궁금한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목회자들에게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말고, 정답을 알려주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저 예배를 인도하면서 성도들이 서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길을 열어주라고 당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신앙이 가능한 성도들이 많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그저 교회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목회자의 설교에 따라 타율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의 참뜻을 찾고, 그 말씀의 의미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병원에서 의사 말에만 의존해서 자신의 건강을 맡겼다가 큰 낭패를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듯이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은 스스로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자신의 주치의는 자기 자신뿐이라고 인식하듯이 자기 신앙은 자기 스스로 길을 열면서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말로만 삶이 곧 예배이고, 신앙이라고 외치는 데서 벗어나 진짜 삶이 곧 구원이 되어야 했다.

만약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을 이루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거듭났는지 아닌지 관심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거듭난 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신앙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 담진 참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말씀에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 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라는 아주 간단한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할 때 우리는 친절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수 있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을 알고 있지만 누군가 우리의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그에게 결코 친절할 수 없다.

우리는 누가 먼저 우리에게 친절할 때 우리도 친절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는 핍박하는 자에게도 친절할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그런 것은 오직 예수님께만 가능한 일이라고 부정해왔다.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만 의지해서 구원받는다는 도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율신앙이다.

 

그러나 자율신앙이란 예수님처럼 나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듯이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가페 사랑인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나쁜 말을 하고 욕할 때 같이 맞받아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친절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행할 때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을 경험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참된 의미인 것이다.

 

이런 성육신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예배의 구경꾼으로 교회에 앉아 있으면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코로나가 터지고 정부와 보건당국에서 교회에서 예배와 모임을 제한했을 때 이를 두고 종교 핍박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예배는 신성한 것이니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오히려 기회였다. 자신의 신앙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방역지침을 잘 지키는 것도 신앙생활의 하나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다른 사람에서 바이러스를 옮기는 성도도 많았다. 자신이 교회에 나갔다가는 사실을 숨기는 사람도 있었다. 방역지침을 어겨서 다른 사람을 감염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까지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하는 것이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은 우리가 예배하는 것보다 세심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몸으로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지 말로만, 4영리로, 반강제적으로 교회 데리고 나와 앉히는 것이 전도가 아니다. 그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을 위한 말과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느헤미야 형제는 작은 교회, 가정예배, 성도 모두 예배에 참여하고, 서로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눌 수 있도록 가정에서 예배드리거나 줌으로 소규모 인원이 예배하도록 권했다.

 

텅 빈 건물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하고 이를 인터넷이나 유트뷰로 생중계하는 것은 이 시대에 맞는 예배방식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가능하면 적은 수가 모여서 혹은 줌으로 서로의 삶을 더 친밀하게 나누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의 삶이 거듭나는 것이 구원이므로 우리는 말씀이 삶이 되는 역사를 날마다 경험해야만 했다.

 

건물교회에서 대규모로 모여서 집회를 여는 식의 예배방식은 이제 바뀌어야만 한다. 초대교회의 가정예배가 가족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장로, 권사의 집에서 자녀들이 우리 엄마, 아빠처럼 예수 믿을 바에야 나는 예수 믿지 않겠다는 말이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

 

풀뿌리 민주주의란 말이 있다.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국민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민주주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인정하지 못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는 작은 것들을 가족들끼리 나누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과 다른 삶의 부분들을 하나씩 바꿔나가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예배 따로 삶 따로의 신앙은 버려야 한다.

일주일 동안 지은 죄를 예배시간에 기도 한 번으로 모두 털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예수님이 모두 용서하신다는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런 말이 통했을지 몰라도 예수를 구주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삶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거듭난 삶이요, 구원받는 삶이다.

 

옥한음 목사는 말년에 구원이란 그저 예수를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그런 설교는 아직 정통이 아니라 어쩌면 목사님의 개인 의견쯤으로 묻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정통이다. 신화(神化, deification)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예수처럼 사는 것!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성도들이 대규모로 건물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데서 벗어나 성도들이 삶이 드러나는 예배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교회여야 하고, 초대교회가 드렸던 가정예배가 부활해야 한다. 말씀 앞에 삶이 드러나고, 말씀대로 사는 삶의 예배가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육신이 되는 말씀이야말로 살아 있는 말씀이 될 것이다. 그저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말씀일 뿐이다. 우리가 삶을 통해 증거할 때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지 각종 전도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에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이 전도가 아니다.

 

건물교회가 텅 비더라도 우리 가정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있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 풍성하다면 교회는 언제나 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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