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것, <정의 正義 JUSTICE> ― 인생의 목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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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선한 것, <정의 正義 JUSTICE> ― 인생의 목적 3

by 브린니 2022. 8. 18.

선한 것, 정의 正義 JUSTICE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답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디도서 2:14/표준새번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디도서 3장에는 이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 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됩니다. 나는 그대가 이러한 것들을 힘있게 주장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선한 일에 전념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선한 일은 아름다우며, 사람에게 유익합니다(디도서 3:5-8/표준새번역).

 

위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의 과정과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힘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믿는 자들, 구원받은 자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삶이며 우리와 이웃 모두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착한 행실로 세상에 빛을 비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 어떤 의미가 있듯이 하나님의 창조에도 목적과 계획 그리고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건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여 선한 일을 하는 사람, 즉 선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 외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착한 행실, 선한 행위로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하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무엇이 선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답을 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표준새번역)

 

미가서 68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이미 보여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의(공의)를 행하는 것, 인자(이웃)를 사랑하는 것,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 중 기본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추구하고자 하는 바르고 곧은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라고 하면 특별한 사람들이 집행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정의의 사도가 되어 특별한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의로운 삶은 일상에서 옳은 것을 행하고, 옳지 않은 것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통신호를 잘 지키는 것도 정의로운 행동일 수 있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도 정의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단순히 남을 헐뜯거나 거짓말하는 것도 불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정의로운 일을 할 것인가, 불의를 저지를 것인가,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직장에서 옳지 않은 일을 강요받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리업무를 맡은 사람이 장부를 조작해 세금을 덜 내도록 하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좋게 말하면 절세이지만 탈세가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개인사업자가 일부러 매출을 줄이고, 경비지출을 늘려 소득신고를 적게 하는 것도 정의롭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명기 25:15)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언 20:10)

 

우리는 사회정의, 경제정의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부터 작은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한 그런 정의는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이클 센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우리의 사고방식은 실용주의(기능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이 정의로운가를 생각하기 전에 이것이 나와 소속집단에 이득이 되는지부터 따집니다. 나의 이기심을 채우는 동시에 만인의 행복을 따져보는 식입니다.

 

어떤 기업이 안전시설에 투자를 게을리해서 노동자가 큰 사고를 당했는데도 시설을 보완하지 않는 것이나 환경보호시설을 등한히 하는 것도 모두 기업의 이익을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보다 더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쟁의가 발생해 기업에 큰 피해가 발생했을 때 누가 손실을 책임져야 하는지 따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손실이냐 노동정의냐 하는 문제가 충돌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매우 복잡한 사회문제이므로 쉽게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 순간 무엇이 정의인지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면 개인이나 사회가 정의를 실천하는데 좀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모든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 정의로울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경에서 정의는 정말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이사야 30:18)

 

하나님께서는 정의가 이 땅에서도 펼쳐지길 간절히 원하시고 정의를 행하지 못하는 공동체를 질타하십니다.

 

정의는 유대민족에게 있어 생사를 결정하는 문제였습니다. 정의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유대 민족에게 정의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선지서(이사야에서 말라기)는 유대 백성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정의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이끄신 후에 왕을 세워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열왕기상 10:9). 다윗왕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사무엘하 8:15). 그러나 솔로몬이 죽자 나라는 남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 당했습니다.

 

유대 민족이 멸망하기 전 하나님은 선지서 곳곳에서 유대민족 사이에서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이사야 1:21)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사야 5:7)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이사야 59:11)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하박국 1:4)

 

정의가 땅에 떨어져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시대가 바로 선지서 시대였습니다.

 

특히 재판 판결을 굽게 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였고, 저울을 속이는 일도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예레미야 5:28)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가 3:11)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미가 7:3)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법에 호소합니다. 그런데 재판이 공정하지 못하다면 억울함을 어디서 풀 수 있습니까. 그 당시 재판관, 왕 같은 권세자, 제사장과 종교지도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지도층의 타락은 그 사회의 몰락을 가져오는 가장 큰 병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제사와 종교의식에 몰두했습니다. 그 시대 유대민족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제사가 날마다 행해지고,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융성한데 자신들이 멸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의 멸망을 예언하는 이사야, 예례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헛된 제사와 종교의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임을 수차례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선한 것은 따로 있으니까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이사야 1:1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예레미야 7:21)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언 21:3)

 

하나님은 제사와 제물을 바치기보다 사회정의를 회복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종교행사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에도 이웃들의 고통을 돌보기보다는 예배가 중요하다고 시위를 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아사와 히스기야 왕이 선과 정의를 행할 때 기뻐하셨고(역대하 14:2, 역대하 31:20)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정의를 회복하라고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예레미야 22:3)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스겔 45:9)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아모스 5:15)

 

선지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이 정의를 회복하면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예레미야 5:1)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에스겔 18:27)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세아 12:6)

 

하지만 유대민족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멸망의 길을 따라 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구할 메시아를 보낼 계획을 세우십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이사야 16:5)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예레미야 33:15)

 

우리는 예수님을 공의로우신 주님을 부르고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에 사는 우리 인간들을 눈물이 없고, 공의와 정의를 가득 찬 하나님 나라로 이끄시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선지서를 읽으면서 조상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해서 멸망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더 잘 지키고, 제사와 같은 종교의식을 더 잘 드리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제사에 목숨을 걸었지만 예수님께로부터 독사의 자식들이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 섬기는 일에 목숨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책망뿐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정의롭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23)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외우는 성경 말씀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번제물과 십일조, 각종 제사와 종교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의(공의)와 인애(긍휼)를 행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언 21:3)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을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민족은 깨닫지 못하였고, 조상들을 비판하는 성경 박사들인 바리새인도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를 재차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제사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면 도와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실천한 것입니다. 그 행동은 매우 정의롭고, 긍휼이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겠노라고 맹세하면서도 진정한 제사가 정의와 인애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저 제사라는 형식적인 종교의식에만 매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유대민족들은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정의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배나 기타 종교행사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우리는 황소를 드림보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찬양을 부르고 있지만 정작 진정한 제사는 정의와 긍휼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요?

 

현재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조상들의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예배(제사)와 각종 종교행사에 매몰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우리가 과거의 유대민족과 바리새인 모두 싸잡아 비판하면서도 선한 일, 정의를 행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여전히 교회를 크게 건축하고,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고, 전도(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것)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외치면서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 선한 일을 행하는 일에는 둔감한 것일까요?

 

 

예수 믿고 천국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지난날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회개합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며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을 삶의 옵션 정도로 여긴 것을 회개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기본 생활이며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다시 새롭게 인식하면서 선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할 것을 다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내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는 말씀 앞에 겸허하게 서서 내 삶을 돌아봅니다.

 

나는 과연 선하게 살아왔는가.

 

고뇌가 더 깊어지는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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