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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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by 브린니 2021. 3. 21.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장 15절~21절)

 

 

이 말씀은 성도와 교회의 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먼저 그 사람에게 다가가 그런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권면했는데도 그가 듣지 않는다면, 다른 성도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사람이 함께 확증하여 그런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듣지 않거든, 이제 교회에 말해서 교회가 그 사람에게 권면해야 하고,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긴다는 것은 유대의 회당이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밖의 사람’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즉 공동체의 모든 권면을 무시한 이에게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회개의 압력을 가해 다시 반성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노력들은 바로 이 땅에서 매인 것을 풀려는 노력입니다. 죄로 인해 매인 사람을 풀게 하려는 노력이며, 그 노력은 작게는 혼자 시작되지만 안 될 때는 두세 사람으로 커지고, 그래도 안 될 때는 교회 공동체 전체가 노력해야 하는 의무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로 인해 매인 것을 우리 스스로 노력하여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리고 19절에서 이렇게 풀려는 노력을 하여 생긴 열매, 즉 죄 지은 자와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서로 합의하고 합심해서 하나님께 이 모든 상황을 말씀 드리고 이후의 일에 대해 맡기는 합심기도를 할 때 그 기도를 이루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모든 노력을 하는 과정이 바로 20절에 나오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입니다. 죄의 권면과 회개와 용서의 과정은 이렇게 여러 사람이 관여되는 매우 공동체적인 과정입니다.

 

21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라는 말씀을 보니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용서하는 사람의 힘겨움에 대해 의문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유대 관습에서는 3번까지 용서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7번을 들고 나온 것은 상당한 자부심과 관대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자랑스러운 인간적 관대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수준까지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말씀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가시넝쿨처럼 자라나는 복수심을 무한한 자비의 법으로 바꾸어 놓는 말씀입니다.

 

원죄 이후에 인간의 복수심은 하나의 본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땅에 가시넝쿨이 자라듯 우리 마음속에 자라는 삐죽삐죽한 가시이지요.

 

아주 어린 아이들도 복수심을 보입니다. 한 대 맞으면 자기도 한 대 때리고 야단을 맞으면 “얘가 먼저 그랬어요.”라고 불만스럽게 소리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원죄 이전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 그 가시넝쿨에 찔리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한 목회자 지망생은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를 용서하기 위해서 기도하지만 용서가 너무 안 되어서 울며불며 주먹으로 바닥과 벽을 쿵쿵 찧어 손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과정이 모두 우리 크리스천, 즉 예수님을 좇는 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여기에서 ‘용서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페소’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죄악 자체를 먼 곳으로 보내는 일입니다. 이는 죄를 범한 형제, 즉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 이상을 뜻하는 말이며, 죄악 자체를 멀리 하는 일이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원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우리의 상태를 원죄 이전으로 회복시키는 구속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구속 역사의 핵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내게 범죄한 자를 용서해야 할 의무는 내게 있지만, 내 힘으로는 할 수가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정말 어려운 과정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그 짐을 회피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내 죄를 대신해 죽으신 그 사랑과 희생과 용서의 상징 앞에서 우리는 외면하고 돌아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를 데려와 주인이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었더니 그가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 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여기에서 ‘동료’라는 낱말이 쓰인 것도 참 귀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모두 죄인으로서 동료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깨끗게 된 동료 말이지요.

 

이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죄인으로 동료이고, 너희를 내가 불쌍히 여겨 내 목숨을 버렸다는 강조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경고하십니다.

 

십자가가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하지 않고 돌아서려는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범죄한 형제와 용서해야 할 자신이 모두 다 죄인으로서 동료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지은 형제를 권면하고 용서하는 일은 십자가의 구속 역사의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럼 현실에서 우리는 정말 이 구속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우선 죄 지은 형제에게 직접 가서 권면하는 일이 얼마나 있는지요? 그리고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확증하여 권면하는 일은요?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가 나서서 권면하여 죄로부터 돌이키게 권면하는 일이 있습니까?

 

범죄한 형제 때문에 고통을 받아 교회에 이야기를 하면 위로해주고 기도해줄 망정 범죄한 이에게 가서 직접 대면하여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권면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막아서고 권면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상당히 두려워합니다.

 

혹시라도 그 성도가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그 집안에 분란을 일으켜 더 문제가 커지지 않을까, 괜히 상처를 줘서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닐까.

 

교회가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기를 원하며, 성도 수를 늘리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절대로 죄에 대해 돌이킬 것을 권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곪아터져 언젠가는 그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는 너희가 저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들추고 도려내는 일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일입니다.

 

열심히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내고 봉사는 하면서 정작 죄를 권면하고 용서하는 십자가의 길에는 등한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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