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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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by 브린니 2021. 3. 7.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장 1절~3절)

 

 

“그때에”란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을 때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묻기까지는 사실 제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고, 그 논쟁이 해결되지 않아 결국 예수님께 물을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미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이 논쟁을 했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슨 토론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으나 제자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제자들이 격렬하게 논쟁하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하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서로 누가 큰지 자리다툼을 하며 권력 욕심을 지니게 된 것은, 베드로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고,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만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앞서 성전세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으라고 해서 그 입에서 한 세겔을 꺼내어 예수님과 베드로를 위해 반 세겔씩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은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내겠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곧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들어가 새 나라를 다스리게 될 거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부푼 기대감 속에서 자신들은 어떤 위치에서 백성들을 다스리게 될지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의 십자가를 앞두고 계신데, 제자들은 세상 왕국을 꿈꾸며 높은 지위를 꿈꾸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했을까요?

 

그러나 따스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일깨우기 위해 한 어린아이를 부르십니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처럼 어린아이 역시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여자와 어린이는 그 집 가장의 재산 목록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보잘것없는 존재야말로 바로 천국에 들어갈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전승에 따르면, 이 어린이는 후에 안디옥의 감독이자 순교자가 된 이그나티우스(Ignatius)라고 하나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이렇게 귀중하게 대하신 일은 곧 귀감이 되어 1세기 크리스천의 편지에 보면 “크리스천은 어린아이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돌이켜’는 헬라어 ‘스트라페테’로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이며 매우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뜻합니다.

 

그저 어떤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수준이 아니라 참회와 거듭남을 뜻하는 전인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전존재의 변화로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는데, ‘어린 아이’란 그저 순진하고 천진난만하고 순결한 믿음을 지닌 수준이 아니라 ‘참된 겸손’을 뜻합니다.

 

‘참된 겸손’이란 지금 제자들의 논쟁에 비추어 보면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욕망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 사회적 권력과 지위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를 세우시며 그렇게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더 나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기 위해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사회적 지위란 우리에게 부와 명예를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 어린이와 같은 무관심을 요구하십니다.

 

어쩌면 현대인들에게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사회적 지위의 획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은 바로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함으로서 자신의 효용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으며 그에 적절한 보수를 받아 경제적 평안을 누리는 것이 필수입니다.

 

마땅히 인간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을 명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라고 말입니다.

 

한 아이가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딴 짓을 하자 교사가 창밖에서 운동장 공사를 하는 인부를 가리키며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커서 저렇게 돼”라고 말했답니다.

 

그 인부가 바로 그 학생의 아버지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지요. 학생은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기고 위축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보면서 사회적 지위를 매기는 일을 매우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렇게 하는 자신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지요.

 

어떻게 해야 이 당연한 듯 보이는 사회적 의식 속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가질 수 있을까요?

 

바로 언제든 자신이 그 사회적 지위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하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겸손한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 죄로 인해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먹고 살기 위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 눈물과 고통 가운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은 바로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삶을 경험하라”는 것이었답니다.

 

상위 1%의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 교만하게도 남모르는 죄를 저질러 심판을 받았을 때 그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어쩌면 그 사람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진작에 자신이 언제든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겸손을 지녔더라면 그렇게 교만하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겸손이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강함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약한 것임을 아는 마음 말입니다.

 

그 약함을 아는 사람은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붙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 범죄하기를 두려워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절대 순종, 절대 순복의 자세입니다.

 

또 한 가지, 어린 아이의 심령을 지닌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듯이 반대로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습니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당연히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편견,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의심과 계산보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투명한 모습, 즉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투명하고 맑고 깨끗하며 비교하지 않는 순수함을 가지지 않으면 예수님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단코... 못하리라”는 이중부정이 사용된 표현으로 절대로 천국에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천국에 자신들이 들어갈 거라 생각하고 거기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김칫국을 마시는데, 예수님은 그런 자세로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아예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뜻도 제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겠지요. 얼마나 단호하고 강하며 무서운 말이었는지요.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우리는 그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과연 내 속에 있는 비교하는 마음, 한 계단이라도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은 마음,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주눅 드는 마음, 나보다 못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 우쭐해지는 마음을, 어린 아이와 같이 이런 방면에 무지한 수준으로까지 바꿀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정교회에서는 이렇게 기도하나 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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