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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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by 브린니 2021. 2. 11.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장 14절~20절)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귀신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성경이 말하는 귀신이란 동양적인 의미의 귀신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까지 다양한 관심사와 이야깃거리를 불러일으킵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귀신은 우리나라 민간 설화에 등장하는 귀신과는 다른 것으로, 맺인 인간이 죽어서 혼백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영적 세력인 사탄 마귀의 졸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사탄은 원래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였는데 하나님의 지위를 탐하여 악한 마귀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마귀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내려올 졸개들을 데리고 왔고, 마귀를 따르는 졸개들이 바로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각종 술수와 거짓말, 변장에 능해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죽은 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무섭고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나 겁준다고 합니다.

 

귀신의 영향력 아래에 강하게 사로잡히면 병이 들기도 하고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각종 중독에 빠지기도 하여 서서히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는 귀신의 영향력으로 간질 발작을 일으켜 스스로 물과 불의 위험 가운데 자신을 내던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최근 발달된 과학은 간질(뇌전증) 신경세포의 전기신호가 비정상적으로 방출되어 경련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우선 약물 치료를 하고 약물 치료가 되지 않으면 수술을 하는 방식으로 치료를 합니다.

 

약물 치료를 하면 대개 10 3명은 발작이 완치되고, 3,4명은 평생 꾸준히 약을 복용함으로 발작을 예방하며, 약물 치료가 어려운 3 정도는 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간질 외에도 많은 질병을 귀신의 소행으로 보았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려 하였습니다.

 

본문에 쓰인 간질 환자의 질병을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음으로 하셨다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당대 기록자의 인식의 한계 아래에서 보는 관점에 따라 그렇게 쓰인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귀신의 소행이었는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확인할 길을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드라마틱한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었다면 이러한 질병의 고통을 이겨낼 있었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질병은 원죄 이후에 우리 삶을 도처에서 공격합니다. 낙원에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었고쇠하여 무너짐, 병듦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죄 이후에 엉겅퀴와 가시덩쿨과 늙음과 쇠함, 죽음이 우리의 삶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현재진행형으로 세균과 병균과 싸우고 있으며 언제든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원치 않는 병에 걸려 고통받을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원죄의 원인이 사단의 유혹이었으므로 이 모든 일이 사단 마귀와 귀신들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지구상에 사는 한, 어찌 보면 필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고통들에 대해서 우리가 대처할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가져라.”

 

여기서믿음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믿음입니다. 자기 자신의 경건생활로 인한 자기 신뢰가 커져서 신념이 강해져 자신의 비전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거라는 자기중심적 믿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믿음이 겨자씨보다 작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셨듯이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지나 대속과 구원의 희생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앞에서 선뜻 내가 고통을 짊어지겠다고 나설 만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잔을 내게서 옮길 있다면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진정 참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겨자씨보다 작은지 알게 됩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믿음의 성을 쌓은 사람들을 봅니다. 철저한 경건생활로 자기의(Rightousness)의 벽돌을 만들어 견고한 믿음의 성을 쌓고 성주 노릇을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조금이라도 해를 입을 같으면 참지 못하고 대노하여 안에서 화살을 쏘아대며 방어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말이지요.

 

이런 방어적 믿음, 자기 자신의 믿음을 키워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말씀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의로운 생활을 한다고 해도 과연 산을 옮길 만큼의 믿음만큼 커질 있을지 자신할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거대한 앞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믿음을 키워서 산을 옮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시선으로 바라보면 자신의 믿음은 항상 겨자씨만하게 작을 뿐이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을 옮기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기에 거대한 앞에서 초연할 있습니다.

 

돌아보면 속에서 옮겨진 산이 여러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산이란 도저히 힘으로는 해결할 없는 어려운 문제를 말하는데, 인생의 폭풍우 가운데 순간 순간 기적처럼 위험을 벗어난 일들을 바라볼 하나님이 산을 옮기셨고 그때마다 여전히 나는 그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을 옮기는 여러 가지 간증들을 듣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각종 중독에서 치유된 사람, 말기암과 같은 질병을 치유받은 사람, 도저히 합격할 없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 도저히 구할 없는 가격에 집을 구한 사람, 도저히 이길 없는 경쟁 속에서 취직에 성공한 사람의 간증도 듣습니다.

 

반면 도저히 견딜 없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새로운 하루의 햇살에 웃는 사람을 봅니다. 억울한 사고로 돌이킬 없는 몸의 장애를 갖게 사람, 장애를 함께 극복해가는 가족, 가운데서도 피듯 자라나는 자녀들, 저녁상에 피어나는 이야기꽃을 보며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의 본문 말씀이 진리임을 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삶, 즉 하나님의 뜻이 새겨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소유한 삶이며, 그때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산은 옮겨지지만 그 자리에 남은 핏자국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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