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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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by 브린니 2021. 1. 17.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장 13~17절)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이란 분봉왕 헤롯 빌립의 이름과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의 이름에서 하나씩 따와서 부른 이름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고, 바알 신이나 판pan 신을 섬겼으며 황제의 신전까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이 우상의 땅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른 신앙 고백을 요구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라는 말에 쓰인 헬라어 ‘에로타’는 행동의 시작을 가리키는 말로 ‘묻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즉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준비하기 위해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러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훈련의 방식은 질문과 대답이었으며 그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예수님 자신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부르는 칭호로 자주 사용된 ‘인자’라는 낱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위격과 성품을 가지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성육신하여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질문은 모든 세상 만물이 맞닥뜨려야 하는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창조주가 인간으로 나타나심에 대해서 너는 깨닫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근원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인 동시에 대답 여하에 따라서 현재와 미래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종말론적인 물음입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이 나쁘게 말하는 것은 전하지 않고 최대한 좋은 말만 전하려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바알세불’ ‘죄인의 친구’ 등으로 말하는 이도 있었는데 제자들은 이런 말은 일부러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최대한 좋은 말만 하려고 했지만 이 대답 역시 조금도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가장 폭발적인 능력으로 일한 세례 요한의 이름을 대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는 잘못된 부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구약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던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고, 말라기에 기록하기를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미리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고 기록한 말씀이 있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엘리야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말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예레미야는 구약에서 백성들을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일한 선지자였고,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예레미야가 선구자로 와서 백성들을 다시 불러모을 거라는 예언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지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예레미야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당시의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모세, 이사야, 에스라 등이 부활하여 종말을 준비하는 큰 선지자로 나타날 거라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예수님을 큰 선지자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각은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온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시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그러나’라는 역접의 어휘가 들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나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너희는”은 ‘휘메이스’라는 말로 2인칭 복수의 강조적 표현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12제자들 각자 한 명 한 명을 강조하여 질문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각 사람의 주관성을 중시하면서 구원은 단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별자들의 주관적 신앙이 어떠한가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개별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12제자 모두의 대답을 대언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적극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을 가진 베드로는 다른 사람보다 나서서 열성적으로 신속하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붙여주신 이름으로 헬라어 이름입니다. 그 뜻은 게바, 즉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완벽한 것입니다. 이 안에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다 들어 있고,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주’는 2인칭 대명사로 ‘당신’이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마쉬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제사장과 왕,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다 감당하신 분이었습니다.

 

또 원문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 ‘호’가 붙어 있어서 오랫동안 기다린 바로 ‘그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가리켜주고 있습니다.

 

“살아계신”이라는 말은 ‘토 조온’으로 ‘영원히 생존하시는’ ‘내적 생명이 충만하신’의 뜻으로 번역되어 영원히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살아 계시는 존재를 말하며,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하나인 본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바(바르)’는 아람어로 ‘아들’을 뜻하며 ‘요나’는 시몬의 아버지 이름 ‘요하나’의 축소형으로 ‘비둘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요나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심으로서 인간의 아들인 시몬을 강조합니다. 그러곤 “네가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아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분을 깨닫게 된 것은 참으로 복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는 말에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 그 한계를 뛰어넘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 담겨 있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에서 “알게 하다”는 ‘아포칼류토’로 ‘계시하다, 보여주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셨기에, 보여주셨기에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할 때, ‘혈육’은 육신과 피를 의미하여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지닌 재능, 지식, 지혜를 뜻합니다. 인간의 한계로는 도저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고 분별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뛰어난 지성과 이성을 지닌 인간일수록 ‘성육신’에 대해서 인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영적 진리는 혈육을 지닌 인간의 모든 것을 뛰어넘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하신 은혜야말로 시몬 베드로가 받은 복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찾는 복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영적 분별력인데, 엉뚱한 세상적 부와 명예의 복을 구하고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지요.

 

또 혈육의 가르침과 능력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영적 진리임에도 인간의 가르침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 말씀에 익숙한 것이 바로 내게 영적 분별력이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이미 선택된 백성인 양 안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어쨌든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므로 영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안심,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찬양과 말씀을 자꾸 귓가에 들려주는 것만으로 이미 함께 더불어 구원의 길을 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 이런 안일함이 과연 예수님 앞에 바른 신앙고백으로 올려질지 의문입니다.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듯이 “인간 아무개의 아들 딸 00아, 이를 알게 하는 이는 혈육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뜨끔하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뒤에서, 혹은 교회 공동체의 뒤에서 은근히 숨어 묻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개별자로서 예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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