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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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by 브린니 2020. 12. 30.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마태복음 15장 21절~23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라고 거기 가버나움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트집잡고자 논쟁을 벌였던 곳입니다.

 

거침없이 그들을 공격하신 예수님은 긴장감이 고조된 것을 느끼고 유대인 지역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위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지역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가나안 여자가 나옵니다. 가나안 여자가 등장하기 전에 헬라어 원문에는 명령어이두 들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말로보라 뜻입니다.

 

다음에 벌어질 사건이 매우 독특하기 때문에 주시하여 보라는 뜻으로 강조하는 명령어가 하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수로보니게여인으로 혈통은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입니다. 하지만 말씀에서는 그녀가 가나안 족이라고 명시함으로써 본래 페니키아에게 점령당하기 전의 혈통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가나안 족이었다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의 자손이 유대인의 메시아에게 나아와 고침을 받고자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메시아의 위대함과 이전의 모든 원수관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여자가 지경에서 나와서라는 구절도 일맥상통합니다. ‘나오다라는 말의 헬라어는여셀두사 단지 걸어서 나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녀의 고향을 등지고 예수께 나아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출신과 고향을 등지고 나온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말은 예수님을 예언된 메시아로서 칭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소망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오히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논쟁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 여겨지는 불구자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익히 보아왔습니다.

 

여인의 마디는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여인은 그저 예수님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 없었기에 마디 말밖에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흉악한 귀신이 들어 위험에 처한 딸의 상황을 예수님 앞에 고하면서 오직 자비만을 구하는 여인의 간구에 예수님은 말씀도 대답지 않으십니다.

 

우리 신앙에서 하나의 화두는주님의 침묵입니다. 우리의 간구에 속히 응답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침묵!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학자들은 가지 견해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유대인의 불신과 비교되는 이방인의 태도를 보시면서 깊이 생각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심한 거부감 때문에 위협당할 처지에 놓이셨고, 그래서 이방지역까지 피해 오셨는데, 정작 이방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이미 저렇게 처절하게 고백하고 있고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여인이 정말 마음속 깊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첨하여 고침 받기 위함인 것인지 시험하고 싶어하셨다는 견해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는 유대인 중심이라는 사실 앞에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는 견해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유대인에게 주어졌고,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나셨으며, 천국 복음도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이방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있어서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셨다는 것입니다.

 

넷째,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인내를 더욱 연단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입니다. 여인이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를 잡듯이 예수님을 붙들 있으나 그것이 온전한 믿음으로 무르익기 위한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말한 가지 견해를 보면서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를 살펴보면서 우리 주님에 대해서 가지 깨달을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진행형으로 생각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때로 마치 주님은 이미 태초 전부터 확고하게 정해진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변치않는 행동으로 생각을 뒷받침하시는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그런 태도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듭니다. 어떤 정해진 생각을 주님께서 갖고 계신다고 믿고 거기에 따라야 하니 뜻을 알려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그건 마치 입을 벌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데, 모습은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은 능동적인 가나안 여인의 간구에 대해서 주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장면은 우리의 속에도 진행형으로 생성되는 장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 우리가 가진 생각을 주님께 전해 드리면 주님께서 생각을 하시고 결정하신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단지 어떤 길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상의하고 함께 나아갈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진취성과 능동성을 부여해줍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침묵은 우리의 열정을 무르익게 하시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의 인내가 무르익는 만큼 우리는 커집니다. 얼마나 커지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아뢴 것에 대해서 주님이 침묵할수록 우리는 자꾸 좌절하게 되고 자꾸 바닥으로 내려가고 작아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시간을 견디는 동안 사실 우리는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우주가 담길 만큼 커지면 주님과 함께 우주를 창조하는 일을 동역할 있을 것입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 보면, 우리가 죽은 이후에 주님께 가서 하는 일은 바로 창조의 사역을 동역하는 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누구도 죽어보지 않았으니 모르지요. 하지만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되기로 부름받았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지금도 우주가 계속 팽창 중이라고 합니다.

 

지구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는 오늘도 다른 별을 창조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의 의식은 지구 안의 물질세계를 떠나서 죽음 이후의 우주 공간 안에서 주님과 함께 다른 창조세계를 만들어갈지 모릅니다. 의식을 함석헌은이라고 표현하였더랬습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가 좌절하고 인내하며 참아내는 시간 만큼 우리의 영은, 혹은 얼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시간은 우리의 얼굴을 예수님을 닮도록 만들어줍니다. 큰바위얼굴처럼 말이지요. 주님의 침묵은 우리를 주님처럼 깊고 크게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의미를 깨달으면 시간을 견뎌낼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가진 의미를 깊이 이해합니다. 소망은 우리의 삶을 구르게 하는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에스겔의 환상 속에서 수레바퀴가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인내와 소망의 수레바퀴를 통해서 흘러가고 탄생과 죽음을 뛰어넘는 시공간으로 안내받게 됩니다.

 

침묵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제자들처럼 서둘러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재촉해서는 되겠습니다. 당장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에서 어찌어찌 살아가야 하는 급한 우리는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뛰어넘어 생각하고 존재하는 사람은 문제를 지그시 바라보며 주님의 생각을 기다립니다. 침묵의 시간을 넘어 주님께서 행동하실 , 행동은 선하기에 옳을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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