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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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by 브린니 2021. 1. 10.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6장 5절~ 12절)

 

 

바리새인들은 전통와 형식을 중시하고 배타적인 신앙을 고수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단의 실체와 부활을 부인하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였습니다.

 

결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부인하게 되었고, 사두개인들은 사람들이 현실 지향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라서 대립하는 사이였지만,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예수께 나아와 하늘로부터오는 표적을 보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직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물고기의 속에 사흘 동안 있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사흘 후에 부활하실 것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서둘러 떠나느라고 제자들이 가져가기를 잊었는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수군대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시고,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을 언급하면서 제자들이 물질적 이적을 경험하고도 깨달음이 없음에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의 의미는 누룩이 다른 음식물에 들어가 발효시켜서 본래의 성질과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본래의 믿음이 다른 상태로 변화될 있다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정신적, 영적 의미로 말씀하신 것을 물질적 의미로 알아듣고 먹을 떡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였으니 믿음이 작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은 오늘날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사두개인들의 전통은 극단적인 자유주의 사상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극단의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 성경 묵상을 통해 자기를 개혁해 나가 복음의 순수함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권위있는 누군가의 , 어떤 교리가 도그마가 되어 힘있게 전파된 등이 도리어 누룩이 되어 한쪽 극단으로 치우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받아들인 것처럼 영적인 말씀을 물질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땅의 떡과 부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됩니다.

 

말씀은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 보수주의, 사두개인, 기복주의 가지의 잘못된 이해가 놓여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물질적 기적을 경험하고도 영적 깨달음이 없이 여전히 물질에 매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기적이 우리의 영적 성장을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게 물질적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의 어떤 기적을 우리에게 주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믿음도 성장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여주는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할 때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는 것이 의미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어봤자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여전히 어떠한 영적 깨달음도 없이 그들 사고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을 언급해주자 제자들은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물질 세계를 뛰어넘는 분이시며 예수님의 말씀 또한 정신적, 영적 내용인 것을 깨닫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형식적 율법주의, 전통주의로서 율법과 형식을 지켜냄으로써 얻는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의는 위선적이며 이율배반적인 것이어서 결국자기 충만하나 영적으로는 무지하고 속과 겉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모세5경의 권위만 인정하고 부활, 영생, 사후의 영원한 세계 사단의 실체를 거부하여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의 형태를 띠며, 이들 역시 실제 삶의 실천적인 면에서는 언행이 불일치하는 위선자의 삶을 살면서 교묘한 합리화로 미혹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런 극단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합니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는 극단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같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5 이상 집합금지임에도 여전히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전통을 고수하며 사회적 지탄을 받으면서도 이것이 모두 사단의 공격이라며 열을 올려 화를 내고 종교 탄압으로 몰고가는 보수주의의 모습을 뉴스에서 자주 봅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너무나 신앙 생활이 흐트러져서 코로나 핑계를 대고 제대로 경건 생활을 하지 않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마음 중심은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니 괜찮다며 자기합리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 위기 상황은 우리의 진짜 믿음을 시험하는 시험대가 되며, 극단의 위선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기회가 되는 같습니다.

 

동시에 교회라는 거대한 안에 숨어 있던 개인의 신앙이 혼자서 얼마나 꿋꿋히 있는지 시험해 보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이라면 남들이 보지 않는 순간, 혼자서 집에 박혀 있는 이때에 진짜로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가 하는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인정 뒤에 숨을 없는 때에라야 비로소 스스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것입니다. 나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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