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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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by 브린니 2021. 1. 31.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28절)

 

 

이 말씀은 예수님의 바른 ‘제자’로서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제자’란 ‘마테테스’라는 말로 어원상 “어느 한 곳에 자신의 마음을 쓰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신분이 아닙니다. 현재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하는 동작 진행형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어디에 마음을 쓰고 있는가, 이 질문이 내가 지금 예수님의 제자인가를 말해줄 것입니다.

 

누구든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목숨(프쉬케)’는 영혼, 생명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육체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인격의 중심, 자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자기애’라는 말은 크게 성공을 거둔 셀럽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상으로 받은 트로피를 가득 진열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이 담긴 커다란 사진을 벽에 걸어두며 너무나도 소중한 자기 자신을 위해 외모를 가꾸고 힐링을 하는 모습이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카메라에 담겨지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거친 세상을 살 수 없다고 사람들은 종종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소중하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삽니다. 하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강탈당하듯이 일자리와 살아갈 힘을 잃게 되는 무서운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관리에 대한 강좌나 책들도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켜 살아나가기도 몹시 벅찹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정말 소중히 여기는 방법은 나 자신을 잃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감정, 내 지성, 내 의지, 내 인격적 자아를 고수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애쓰다보면 어떤 다가오는 상처와 고통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들을 털어버리려 하고 고통당하지 않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듯이 그 고통에 자신을 내놓는 것이 오히려 영혼을 지키는 일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면 오히려 참 생명의 환희를 맛보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찾으리라’는 말씀은 뜻밖의 구원을 뜻합니다. 오히려 죽음을 각오하였는데 뜻밖에도 거기에서 완전하고 충만한 상태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부연 설명하시기를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우선 전제가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이 어떻게 온 천하를 얻을 수 있을까요? 사실 어느 누구도 온 천하를 얻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마치 온 천하를 얻을 듯이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것마냥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선합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것마냥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다가오는 고통을 밀어내며 자신의 탈출구를 찾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 당하기 싫어서 차라리 혼자가 되기를 택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갈수록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애인이 있어도 결혼하지 않고 연애만 하며 더 이상의 관계로 엮이는 고통을 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낳아 키울 때 생겨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당하고 싶지 않아 아예 자녀를 낳지 않으려 합니다.

 

또 결혼과 출산을 통해 한 가정을 꾸리고도 그 안에서 생겨나는 문제들 속에 고통당하지 않으려 가정을 깨고 해체해 버리기도 합니다. 각자의 평안을 추구하며 고통에게 안녕을 고하고 떠나갑니다.

 

마치 세상의 중심이 자신인 것처럼 자기만의 세상 속에서 가장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자기만의 세상,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자기만의 천하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냐고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창조 원리는 관계성이었습니다. 선악과가 거기 놓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을 따르느냐 거스르느냐로 나타난 관계성의 유지 문제였습니다.

 

관계의 배신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신뢰의 믿음을 깬 행위,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인간에게 죽음이 생겨났습니다.

 

피곤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관계를 끊어 자기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세상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창조 원리를 배제하여 결국 죽음으로 치닫는 일입니다.

 

이혼율 증가와 출산율 저하로 미래 세대의 인구 분포가 암울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가장 소중한 가족관계마저 이렇게 해체해 버릴 수 있다면 다른 인간관계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삶은 흘러가게 마련이니까요. 다만 내가 소중히 여겨온 관계 속에서조차 고통이 일어날 때 우리는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행한(프락시스)”이란 각 개인의 활동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의 실제 삶을 보시고 평가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성경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행함을 보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 적혀 있습니다.

 

일단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것이니 내가 마음으로 믿는다 하고 입술로 시인했으니 되었다고 생각하는 안일함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행함을 분명히 보시겠다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해석이 난해한 구절입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많아서 오순절 사건이나 재림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예수님의 왕권이 임하는 것은 바로 복음의 전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늘어나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전 세계로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왕권이며 통치라고 보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베스트셀러는 성경이며, 유불선 사상으로 점철되어온 이 한번도에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져 천만 기독교 인구로 발전했다는 이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나의 왕국과 나의 천하를 위하여 나를 소중히 여기며 내가 고통받지 않을 방법을 찾고 내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가. 혹시 내 왕국의 안녕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차용하는 것이 아닌가.

 

진정 창조의 원리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피하지 않는 어린양의 삶을 살아가는 제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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