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것 <이웃 사랑> ― 인생의 목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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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선한 것 <이웃 사랑> ― 인생의 목적 4

by 브린니 2022. 8. 28.

선한 것 <이웃 사랑> 인생의 목적 4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미가서 68절에서 말씀하시는 선한 것 중 두 번째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자란 사람이란 뜻입니다.

특히 약하고 힘없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인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아주 약하고 힘없고 겸손하고 낮은 자로 오셨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는, 세상에서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는 한 사람일 뿐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자신을 지극히 낮춤으로써 사람들을 섬기는 분이 되셨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약하고 힘없는 자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을 뜻합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강도 만난 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한 행위를 뜻합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흔히 만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18)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양 근대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나를 다른 누구와도 다른 나라고 인식합니다. 나는 오직 나일 뿐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타자를 뚜렷하게 구분합니다.

언제나 나, , ,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확실하게 구별해서 그 사이에 어떤 타협도 불가합니다.

 

나는 나, 너는 너일 뿐입니다.

 

지난 세기에 어떤 시인은 <나는 너다> 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저 나는 너다라는 역설은 그저 시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여깁니다.

 

 

성경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제는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성경에 능통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누가복음 10:29)

 

그때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시고는 그 율법학자를 향해 되묻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0:36)

 

율법학자가 자비를 베푼 자(사마리아 사람)”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처럼 행하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단순히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율법학자와 예수님의 질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냐?”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입니다.

 

질문이 다르면 답도 다릅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나와 타자의 구별이 뚜렷합니다.

 

vs 이웃.

 

나의 이웃이 누구냐?라는 질문에는 나는 주체로, 이웃을 객체(대상)로 보는 생각이 뚜렷합니다. 즉 이 질문은 나의 타자로서의 이웃은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에는 가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

 

누가 강도 만난 자이며 누가 이웃입니까?

 

<나>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예수님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님은 (울법학자)”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율법학자의 (율법학자)의 이웃은 누구냐?”라는 질문은

예수님의 질문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 누구냐?”를 거치면서

자비를 베푼 자라는 답이 나오지만 <>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예수님은 를 빼고 그 자리에 강도 만난 자를 놓고 질문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강도 만난 자가 바로 (율법학자/우리 모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울법학자는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눈먼 자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도식으로 쓰면 이렇게 됩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냐?

 

나(강도 만난 자)의 이웃(자비를 베푼 자) = 나

 

그러니까 "나의 이웃()은 나"입니다. <나는 너다>라는 역설이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웃은 나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단독자로 창조하시지 않고 관계의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자와 남자로 창조하셨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시고 남자의 몸에서 갈빗대를 취해서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이를 보고 내 살 중의 살, 내 뼈 중의 뼈라고 말했습니다.

 

너는 나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나로, 너를 너로 인식하고, 구분하고 서로 다른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람으로 창조하셨고, 나와 너 구분 없이 사랑하면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서로에게 죄를 전가했습니다

 

나와 타자를 철저히 구분하면서부터 이웃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을 나(선택받은 백성)”로 여기고 믿지 않는 자를 너(이방인)”로 여겨 전쟁을 일으키고, 노예를 부리고,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단순한 계명이 아닙니다.

거기에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곧 이웃입니다.

나는 강도 만난 자인 동시에 자비를 베푸는 자인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이웃이며 너는 나의 이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며 서로 자리를 바꿉니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강도 만난 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강도 만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로 바꾸십니다. 

 

이 새계명에는 주체와 대상이 없습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전혀 없습니다. 

 

나와 이웃은 동일한 존재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이기에 주체와 타자가 하나이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나 혹은 앞으로 구원받을 자나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인 우리는 사랑할 때 겸손으로 행해야 합니다

인자,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처럼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겨야 합니다.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나와 너는 똑같다. 모두 죄인이며 강도 만난 자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처절한 인식이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과 같은 이웃”과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구제사업의 30% 이상을 담당하고 구제와 선교에 열심을 다하는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도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점점 더 고뇌가 깊어지는 저녁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 나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나 자신에게 하듯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앞서 행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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