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없다 (2) : 진짜 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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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없다 (2) : 진짜 교회 2

by 브린니 2024. 2. 5.

교회는 없다 (2) : 진짜 교회 2

 

 

일주일이 지났다.

 

느헤미야 형제는 지난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고민해왔던 것을 지난주부터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대 이후의 우리의 삶과 신앙은 실제로 매우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달라진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맞게 삶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앙 역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제 건물과 제도로서 존재했던 교회는 거의 다 무너졌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가 무너졌다고 해서 신앙이 무너진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교회 자체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교회란 곧 성도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있다면 교회는 언제나 왕성하며 그리스도의 왕국은 더 굳건히 설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교회에 성도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 사라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모두 문을 닫아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있는 한 신앙은 계속 될 것이다.

 

주일 오전 느헤미야 형제가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곧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건물과 제도로서의 교회에서는 제 자리와 역할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은 아마도 아직 여기에서 꼭 말씀드려야 할 것들이 남아서일 것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여러분들이 당뇨병에 걸려 오랫동안 약을 먹고 몸이 망가진 A씨의 경우와 여러분이 같은 경우일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뇨 위험이 있지만 식사조절을 하고, 운동을 하면 충분히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A씨에게 당뇨약을 처방함으로써 더 이상 당뇨약으로부터, 당뇨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병원과 의사에 대해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셨나요?

지금 우리 성도분들 역시 교회에서 목회자의 말씀(처방)에 따라 이것은 좋은 것, 이것은 나쁜 것,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저것은 아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성경에 없다, 이런 말씀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20, 30년 해왔는데도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와 얼마나 닮게 되었습니까?

 

구원이란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처음부터 신앙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성도분들은 구원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삶을 온전히 살아갈 때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구원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통해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 구원의 문제입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는 우리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본보기로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사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삶 자체가 예수의 삶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작은 예수로 사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며, 구원받는 것이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을 바라면서 삶을 엉망진창으로 산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천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세상과 죄와 악의 종으로 살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나가면서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 나라의 선한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사는 것이지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살아야지 왜 죽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A씨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A씨는 당뇨 위험성을 예고받자 병원에 가서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당뇨약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병을 고치기 위해 병원 찾았는데 8년 동안 당뇨약을 먹고 있으니 A씨는 과연 당뇨환자일까요, 아닐까요?

 

A씨는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당뇨환자일 뿐입니다. 심지어 당뇨를 고칠 수 있는 초기, 골든타임을 다 놓쳐버렸습니다. 이미 8년이나 약을 먹었기에 몸이 약에 길들여져서 더 이상 약을 먹지 않고는 당뇨를 조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죄와 세상과 이기적인 자기 자신에서 해방되어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물과 제도로서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과연 구원받은 것인가요? 신앙생활을 수십 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대로 이웃과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이 과연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인가요? 우리가 과연 구원받는 사람이 맞나요?

 

A씨는 8년 동안 병원과 의사 말에 무조건 맹종하면서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고 후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병을 제대로 알기 위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8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먹는 약이 어떤 약인지 찾아보았습니다. 포장을 뜯자 용법 설면서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효능·효과]

이 약은 **********의 병용투여가 적합한 제2 당뇨병 환자의 혈당조절을 향상시키기 위해 식사요법 및 운동요법 보조제로 투여한다.

 

자신이 먹고 있는 약은 치료제가 아니고, 식사와 운동요법의 보조제였던 것입니다. 당뇨병은 약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식사와 운동으로 개선하고, 약은 그저 보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계속해서 약을 증량하기를 권했고, 오히려 약 때문에 식사와 운동요법으로 당뇨병을 개선할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자신들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들보다 더 몇 배나 지옥 자식들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모든 것이 A씨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당뇨에 걸린 것부터 당뇨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으나 엉뚱한 처방을 받고서도 거기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병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 병과 적극적으로 싸우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병원과 의사에게 정당한 환자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A씨는 의사의 영업을 방해했다는 죄로 그 병원에서 쫓고 말았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교회와 목회자에 대해 의문을 품고 강력하게 질문을 하거나 성도로서 정당한 의견을 제시했는데도 비난을 받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것이 A씨의 책임이었기에 그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약을 먹지 않고, 병을 낫게 할 방법을 백방으로 찾았습니다. 그러나 약에 절어 있던 그의 몸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거의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A씨는 포기하지 않았고, 현대의학이 아직 제대로 찾지 못한 당뇨병의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치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그는 의학 지식이 부족하고 경험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동안 자신이 입으로 먹었던 많은 음식들이 사실은 독이었다는 것을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도 그것이 몸에 해롭다는 것쯤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독이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독을 끊고 새로운 약을 찾았습니다.

화학적으로 가공해서 만든 음식들은 절대 먹지 않았고, 신선한 과일과 채소로 식단을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에서 나오는 식재료들이었습니다. 최대한 유기농 식품을 찾아 먹게 되었습니다.

 

그의 몸은 조금씩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 이제 성도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A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부터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첫걸음부터 수정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스스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혼자 성경을 읽고 그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자도 아닐뿐더러 성경에 대해서 혼자 해석할 수준이 못 됩니다. 사실 이것도 문제입니다. 2, 30년 교회를 다녔다면 이제 성경을 읽고 그 뜻이 무엇인지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교회와 목회자들이 여러분을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 물론 내가 성경박사라고 생각하시는 장로님들과 권사님들도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정말 그분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니까요. 권사님들 가운데 새벽기도에서 울고불고 하다가 집에 가자마자 남 욕을 하거나 며느리를 구박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다 가짜입니다. 장로님들이 사업상 비리를 저지르거나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죄로 여기니까요.

 

아무튼 우리는 이제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처음엔 정확한 뜻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럼 주석을 찾아보십시오. 인터넷에는 무료 주석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유튜브도 들어보시고,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나 반드시 자신이 검토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정말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말씀하고 있다면 그 뜻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자신의 것으로 마음과 몸에 새겨질 것입니다.

 

A씨가 잘못한 것은 단순히 병에 걸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병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고, 병원이나 의사의 말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듣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는 자신이 주치의입니다. 자기 영혼 역시 자신의 것이지 누가 돌봐주지 않습니다.

 

당뇨약에 보조제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병원과 의사는 여러분의 몸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저 약간 도울 뿐입니다.

 

건물과 제도로서의 교회와 목회자들 역시 여러분의 영혼이 그리스도처럼 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분들이 여러분을 천국에 이끌어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병원과 의사를 환자를 고치기는커녕 환자를 더 병들게 하고, 교회와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더 상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가뜩이나 병들고 상처받고 피난처를 구해왔는데 그 피난처에 마녀가 살고 있어서 그 사람을 통째로 삶아 먹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처지인 것입니다.

 

병원과 의사는 환자를 통해 돈을 법니다. 그래서 환자를 고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돈 버는 데 목적을 두는 순간 그들은 환자를 더 심한 중환자로 만들고 맙니다.

 

교회와 목회자들도 성도들의 헌금에 관심을 두는 순간 교회 부흥과 발전이 목적이고, 성도들의 영혼은 나몰라라 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과 의사,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자신들이 마치 환자와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정반대로 그들을 죽이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자신을 삼키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순교도 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의 설교에 대해 이의를 달거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하면 그들을 아량으로 보아 넘겨주지 않습니다. 그들을 설교 시간에 비판하거나 회의나 기타 모임에 빗대어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십일조와 헌금에 열심을 내지 않으면 직분을 주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무겁게 여기고 있지만 잘 실천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가르치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는 분들이 이웃의 잘못을 가만두고 보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잘못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이웃이 내게 행한 잘못에는 눈에 불을 켭니다.

 

목회자들이 성도의 눈에 있는 티를 가만두고 보지 않으니 성도들도 이웃들의 잘못에 결코 관대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감사하면서도 이웃을 구원할 생각조자 못합니다. 이웃에게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범한 죄나 잘못을 덮어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구원은 우리가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속했듯이 우리가 그를 대속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이웃에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하는 것, 이전에 우리가 그들의 구원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를 죄에서 주님께서 구원하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야 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대속은 그리스도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가 이웃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이웃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자존심, 이기심, 명예 등을 내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대로 겉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것입니다. 수련회 때 연례 행사로 하는 세족식 같은 보여주기식 말고, 진짜 모욕과 치욕을 뒤집어쓰고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가 손해보더라도, 내가 욕을 당해도, 내 자존심이 구겨지는데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는 신령하고 거룩하게 사는 성도가 되기를 꿈꾸면서 예배와 수련회와 각종 집회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주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로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는 것은 정말 다른 문제입니다.

 

주차 문제, 층간소음 문제와 같은 지극히 사소한 문제로도 칼부림이 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장례식장에서 유산 문제로 형제들끼리 싸웁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란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니까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아주 쉽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선한 분이시니까요.

 

그런데 나를 욕하는 이웃, 내게 손해만 끼치는 이웃, 나에게 모욕을 주는 이웃을 어떻게 사랑한단 말입니까.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내가 만족을 주는 사람은 언제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돌보고 싸맬 수 있을까요.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겠다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저 역시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모두 다 할 수 있다.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위해 죽는 것을 뜻합니다.

 

이웃을 위해 죽었기에 우리는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셨기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이란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느헤미야 형제가 말씀을 마치자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코로나 시대 이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달라진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음주엔 그것에 대해 서로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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