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지녀 <모딜리아니의 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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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지녀 <모딜리아니의 화첩>

by 브린니 2022. 6. 12.

모딜리아니의 화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 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김지녀

 

 

 

산책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숨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프랑스 사람으로 알고 있다.

피카소도 스페인 사람인데 프랑스인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많다.

모딜리아니는 심지어 유태인 피가 흐른다.

 

 

프랑스 파리는 한때 모든 예술가의 도시였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사람이지만 거의 프랑스 화가라고 할 수 있다.

파리는 예술을 매개로 각국의 예술가들을 끌어모아 그들을 프랑스인으로 만들었다.

예술가들에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본래 태어난 조국,

다른 하나는 프랑스.

 

20세기 후반, 21세기는 파리 대신 뉴욕!

돈이 많은 곳에 예술가들도 많이 모인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그림 속 사람들은 모두 목이 길다.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은 사슴이다.

그렇지만 사슴이 정말 슬픔에 젖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인물도 목이 길어서 좀 슬퍼 보이기도 하다.

슬프면서 약간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우수에 차 있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그것을 우아하고 기품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좀 우아한 것은 사실이다.

 

 

우아하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가장 설명하기 힘든 게 우아하다는 말이다.

 

기품있는 것은 어찌보면 대충 보면 안다.

하지만 우아하다는 것은 정의하기 정말 힘들다.

 

어떤 인물의 모습이나 행동이 그저 우아하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어째서 우아하다고 설명하면 우아하다는 말의 느낌이 좀 떨어진다.

그냥 우아한 것은 우아한 것이다.

뭐라고 정의하기 어렵지만 왠지 우아한 것, 그게 우아하다는 것이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우아한 공주나

우아한 귀부인은 늘 꼿꼿하게 앉아 있다.

그러다 차를 마시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거나

부채를 찾아 아주 느릿느릿 부채질을 한다거나

땀이 날 정도 더운 날씨에도

짜증내는 법 없이 가끔씩 손수건을 들어 이마를 살짝 찍어내릴 때

우아하다!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이거나

크게 웃거나

몸짓을 크게 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분명하고 단호하게

엷은 미소를 띠지만 (큰 웃음을 담고)

손을 살짝 들어도 바람과 향기가 함께 몰리고

 

우아한 것은 그저 언뜻 보았을 뿐인데도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느낌, 이다.

 

어떤 그림을 보면서 우아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단연 모딜리아니가 최고다.

 

모딜리아니는 거의 대부분 인물만을 그렸다.

그는 왜 다른 것은 거의 그리지 않고 사람만 그렸을까.

 

그는 사람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우아함.

 

그는 사람이 우아할 때 가장 아름답다고 여긴 것일까.

근원적인 우아함.

 

그가 예술을 통해 찾으려 했던 것이 이것이었을까.

 

예술이란 것이 현실에서, 일상에서, 없어도 되는 것이듯이

우아함 역시 사람이 꼭 지녀야 할 덕목은 아닌 것이다.

 

약간 빗나간 것,

약간 벗어난 것,

약간 넘어서는 것,

굳이 없어도 되는 것이지만

있으면 살짝 좋은 느낌,

그런 것이 우아함이 아닐까.

 

예술도 그렇다.

하지만 가끔 계절이 바뀔 때마 흥얼거리게 되는 오페라 아리아 한 대목

화장실이나 복도, 현관에 걸린

인상파 화가의 그림 한 점.

딱히 없어도 되지만

언뜻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 나가네

 

얼굴이 빗물에 쓸려 내려갈 때 그것을 슬프게 바라다보는 목.

기우뚱.

 

우아함을 넘어서는 것은 슬프다.

 

목이 너무 길어서 액자를 넘어가면 좀 견디기 힘들다.

우아함이란 약간의 제약 속에서 언뜻 빛나는 것.

 

삶도 예술도 넘어서지 않는 선의 경계가 있을 때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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