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유림 <바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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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유림 <바게트>

by 브린니 2022. 6. 10.

바게트

 

 

 

바게트를 먹었네 네가 한 말은 잊고 싶었고 말보로를 피웠네 네가 준 거였지 허물어진 성벽 비슷한 거 옆에 걸터앉아 먹었네 네가 한 말은 잊고 싶었고 너는 여행을 잠시 다녀오겠다고 한 건가 내가 산 건 치즈다 치즈 한 조각을 바게트에 올려서 먹었네 네가 한 말은 잊어가는 중인 것 같고 바다를 본다 초가을에도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게트를 먹네 네가 한 말은 잊고 싶었고 너는 여행을 잠시 다녀오겠다고 한 건가 내가 산 건 치즈다 치즈 한 조각을 바게트에 올려서 먹었네 네가 한 말은 잊어가는 중인 것 같고 바다를 본다 초가을에도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게트를 먹네 네가 한 말은 잊고 싶었고 여기는 묘지가 아름다웠네 묘비는 제각각이고 네가 한 말을 잊고 싶어서 모르는 남자를 따라갔더니 무덤이었네 나는 오늘도 바게트를 먹네 남자가 찾아와 말보로 한 개비를 주었네 잊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남자가 내 옆에 걸터앉았네 나는 프랑스어를 몰라 바다를 본다 초가을에도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어 잊어가는 중이었는데 그가 말보로 한 개비를 주었네 손을 잡고 Park Park 묘비가 제각각이었지 누운 묘비 낮은 묘비 거대하게 흰 묘비 나는 잊어가는 게 있는 것 같고 노닐면서 이 사람은 숨바꼭질이 뭔지도 모를 텐데 자꾸 숨었네 이국의 묘지기가 나를 숨겨주었네 매일 바게트를 먹었네 그가 준 거였지 치즈도 주었고 바다를 찾아올 겨울로부터 숨은 내가 잊어야 할 무엇에 대해 생각했네 그것은 문 혹은 그 비스무리한 나는 여행을 잠시 다녀오게 된 건가 여기는 묘지가 아름답네 그가 매일 말보로 한 개비를 주었네 바게트를 먹으며 매일 생각했다 저 바다 겨울에도 바다로 뛰어드는 관광객들, touriste, 그가 내게 꽃을 내밀며 말했네 오늘은 뭔가를 잊어가는 중인 것 같고 나는 이제 바닷가로 내려가 보고 싶다고 말했네

 

김유림

 

 

산책

 

사람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생기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한다.

어떤 습관을 계속 반복하기도 한다.

 

사랑을 잃은 어떤 사람은 계속 먹기만 한다.

이별에 슬픈 사람은 계속 울기만 한다.

 

미친 사람처럼 중얼중얼 어떤 말을 반복한다.

떠난 사람이 내게 던진 충격적인 말을 되새김질 한다.

 

네가 싫어.

네가 지겨워.

널 보면 돌아버릴 것 같아.

우리 잠깐 시간 좀 갖자.

 

이 시의 주인공은 떠난 애인이 이렇게 말한다.

나 여행 좀 다녀올게.”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편도 승차권을 끊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이 아니라 그냥 떠나는.

 

시적 화자는 떠난 사람의 말을 계속 반복한다.

여행을 잠시 다녀오겠다고.

 

그리고 지금 내 상황을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바게트를 먹는다.

나는 말보르를 피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네가 한 말을 잊으려고 한다.

반복해서 잊으려고 한다.

 

그래서, 잊으려고,

나는 네가 한 말을 반복한다.

 

그런데 네가 한 말을 자꾸 반복하니까

결코 잊을 수 없다.

 

너는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했고,

나는 여행을 떠나왔다.

 

네가 한 말을 잊으려고,

네가 여행을 다녀온다는 말을 잊으려고

나는 여행을 떠난다.

 

나는 묘지 앞에서

죽음 가까이, 죽음 근처, 죽음 언저리에서,

바게트 빵을 먹는다.

말보르 담배를 피운다.

 

 

잊으려고 한다고 잊혀지는 것도 아니고,

애써 기억하려고 해도

망각하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기억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도 잊는 경우가 있다.

너무나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이라서 망각 뒤에 잠시 감춰두는 것이다.

무의식의 창고에 숨겨두는 것이다.

 

무언가를 반복하게 되는 강박증

무언가를 계속 반복하는 중독.

 

인간은 거기서 벗어나기 참 어렵다.

 

어떤 트라우마가 반복되어 나타날 때

망각 속에 있던 기억들은 귀환한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피부에 생생하다.

망각은 고삐가 풀린다.

 

시간은 멈추고

과거 어느 때에 고정된다.

 

 

이제 긴 호흡을 하고,

모든 생각을 멈추고

뇌를 정지하고

푸른 바다나 호수 한복판에 있다고 생각하고

몸을 띄워보자.

 

길게 숨을 내뱉으면서 온 신경을 호흡하는 데에만 집중하자.

마음을 살짝 붙들고

조금씩 가라앉히자.

 

텅 빈 우주를 붕 뜨는 기분을 느끼면서

내가 나를 벗고 무한한 공간 속에 던져지는 느낌을 느껴보자.

 

나를 생각하지 말자.

내가 없는 듯

나를 그냥 내버려 두자.

 

길고 깊은 숨을 쉬면서

숨 쉬는 것 말고

다른 것에는 신경을 빼앗기지 말자.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쓰지 말고

몸에 힘을 빼고 눕자.

 

빵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몸을 쓰는 일은 내려놓자.

 

천천히 숨을 쉬면서

내 호흡을 듣자.

 

텅 빈 시간과 공간이 열리는 것을 느끼자.

 

 

이렇게 긴 호흡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고통스런 기억이나 트라우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주문처럼 외우는 반복되는 말들을 멈춰야 할 때가 있고,

바게트 먹는 걸 멈추고,

담배를 끌 때가 있다.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어쩌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복이 될 수도 있다.

 

일상에 틈을 내고

나를 불타는 열정으로 내몰았던 사랑의 파도가 지나가고 난 뒤

다시 일상이 시작된다.

 

트라우마의 반복이 아니라

이제 일상이 반복된다.

 

같은 반복이지만

내용이 전혀 다르다.

 

노동과 식사와 사람과의 대화

그리고 휴식과 취미 활동 등

 

일상이 더 아름다운 시간이 되도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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