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소월 <못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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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소월 <못 잊어>

by 브린니 2022. 5. 15.

못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어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김소월

 

 

 

【산책】

 

 

역설paradox이란 자기가 말하는 것과 속마음이 다를 때 쓰는 말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이놈아 나가 죽어라, 라고 말할 때 과연 나가 죽으라는 게 속마음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부모는 그 자식에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내 뜻을 거스르니?

만약 그런 식으로 살다가 네가 죽으면 내 마음은 찢어져 죽을 거야, 하고 (속으로) 말하는 것이다.

 

김소월의 시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떠나도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말은

당신이 떠나는 것은 눈물 흘리는 정도로는 상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아프다,

나는 거의 죽을 것 같다, 라는 뜻이다.

나는 죽어도 당신을 보낼 수 없다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읽을 수 없는 시, 그것이 김소월의 시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못 잊기에 늘 당신이 생각납니다)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이렇게 못 잊은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그렇게 살다보면 잊는 날이 있을까요?)

못 잊어 생각이 나겠어요 (당신을 잊지 못해 생각이 납니다)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은 채 세월만 보냅니다 : 시간이 가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잊히지 않습니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못 잊고 살지만 가끔은 당신을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 (가끔 어느 순간 잊힐지라도/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럴 것입니다)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너무나 당신을 그리워해서 잊지 못하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과연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뜸해질까요?)

 

나는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못 잊어>

이 시의 제목만 속마음을 드러낸다.

 

싯구들은 모두 못 잊어도 잊겠다.

혹은 잊혀질 것이다.

못 잊어도 한 세상 살겠다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진실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아프기에,

너무나 그리움이 사무쳐 죽을 것 같기에,

마치 그렇지 않은 척

마치 잊은 척

어쩌면 잊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나는 당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진실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속성상 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빛은 빛을 발한다.

그 빛이 아주 조금만 어둠을 밝힐 뿐일지라도.

 

진실은 당신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못 잊어. 그것만이 진실이다.

시의 제목만 직설이다.

 

다른 것은 차마 진실을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한다.

그러나 목적지는 한곳이다.

당신을 못 잊어 살뜰히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당신을 잊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 거기에 내가 서 있다.

당신은 그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돌아와야만 한다!

 

 

절창이다.

창자가 끊어질 듯 노래한다.

 

잊지 못한다고.

사랑한다고.

당신 없이 한 세월을 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그것은 죽음과 같다고.

 

그러니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해

당신은 내게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리움으로 망부석이 되어 죽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못 잊고

기다리겠다고!

 

생생히,

살아서!

 

 

못 잊어!

 

 

# 베이스 바리톤 길병민의 <못 잊어>를 들으며……

https://www.youtube.com/watch?v=JNa_dpGa2ck&ab_channel=Various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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