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임솔아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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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임솔아 <동시에>

by 브린니 2022. 5. 10.

동시에

 

 

자판기 불빛을 마시러 갔다. 만지작대던 동전을 넣으면 금세 환해지는 게 좋았다. 종이컵과 악수를 하는 게 좋았다. 갓 태어난 메추라기처럼 따뜻한 종이컵. 테두리에 이빨 자국을 새기는 게 좋았다. 의자 위에 세워두었다. 내가 버린 컵은 편지가 되었다.

비바람 치는 밤에는 빗방울들이 악착같이 나를 부르는 게 좋다. 발음이 어려운 내 이름을 두 번 부르게 하는 게 좋다. 내 이름을 모른 체하느라 벗어놓은 옷을 내가 뒤집어쓰는 게 좋다. 폭우에 몸을 녹이느라 폭우를 맞는 게 좋다. 성당의 첨탑 아래에서는 악마와 천사가 공평하게 부식되는 게 좋다.

종이컵 편지에 빗방울이 모여들 것이다. 빗방울이 모여 구름을 새길 것이다. 연녹색 손바닥이 버짐나무 가득 퍼드덕거릴 것이다. 잘 가라는 손짓이면서 동시에 잘 있으라는 손짓일 것이다.

 

 

―임솔아

 

 

【산책】

 

이 시의 첫 연을 다시 읽어보자.

 

자판기 불빛을 마시러 갔다. 만지작대던 동전을 넣으면 금세 환해지는 게 좋았다. 종이컵과 악수를 하는 게 좋았다. 갓 태어난 메추라기처럼 따뜻한 종이컵. 테두리에 이빨 자국을 새기는 게 좋았다. 의자 위에 세워두었다. 내가 버린 컵은 편지가 되었다.

 

이 시의 첫 연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인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감성이 모두 전달된다.

 

캄캄한 밤에 홀로 불을 켜고 있는 자판기 앞에 서 본 적이 있는가.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종이컵 떨어지는 소리와

물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커피와 설탕과 프림이 뒤섞인 달짝지근한 냄새가 난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따스함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듯한 포근함

 

커피 한 잔을 손에 쥐었을 때의 느낌.

커피 한 모금을, 첫 한 모금을 마실 때의 느낌.

 

미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는 다른 것을 이야기 한다.

 

자판기 불빛을 마신다.

종이컵과 악수한다.

종이컵에 이빨 자국을 내고 좋아한다.

종이컵을 난간에 세워두고,

편지 같다고 느낀다.

 

편지!

 

이 시는 이제부터 다른 것을 환기한다.

 

 

잘 가라는 손짓이면서 동시에 잘 있으라는 손짓일 것이다.

 

 

비바람 치는 밤에는 빗방울들이 악착같이 나를 부르는 게 좋다.

 

폭우에 몸을 녹이느라 폭우를 맞는 게 좋다.

 

비바람이 치는 밤에

우산 없이

거리 한복판에 서서 떨면서

비가 내리는 소리

비가 땅에 때리는 소리를 듣는다.

 

비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나는 내 이름을 모른 체 한다.

그 대신 그 비를 피하지 그냥 그대로 맞는다.

 

젖은 몸을 말릴 수 없고,

더욱 흠뻑 젖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 빗속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

 

 

성당의 첨탑 아래에서는 악마와 천사가 공평하게 부식되는 게 좋다.

 

비바람이 치는 밤

자판기의 불빛에 기대는 밤에는

선과 악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저 인생에 대한 따뜻한 친절이 그리울 뿐이다.

 

그래서 내 이빨 자국이 찍힌 종이컵은 누군가를 향한 편지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잘 가라는 손짓이면서 동시에 잘 있으라는 손짓일 것이다.

 

그저,

잘 가라

잘 있으라

 

그것이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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