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임솔아 <하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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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임솔아 <하얀>

by 브린니 2022. 5. 4.

하얀

 

 

 

불을 끄니

불을 켜고 있을 때의 내 생각을 누군가

훤히 읽기 시작한다.

 

낮에 만난 이야기들은 햇빛에 닿아

타버렸다.

 

베란다의 토끼는

귀가 커다랬고 털이 하얬고 나날이

뚱뚱해졌다.

 

내가 없는 한낮에

벽지를 뜯고 책상을 갉고 내 운동화를 핥다가 어느 날

죽어버렸다.

 

입술을 뜯어 먹다가 내 입술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빨아 먹었는데 왜 그랬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살인자는

대답한다. 나는 다른 죽음을 향해

채널을 바꾼다.

 

불 꺼진 방에

앉아 있다. 아픈 사람처럼 누군가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토끼를 씻어주었던 날 토끼는 죽었다.

나는 두 손으로 누군가의 까만 그림자를 씻는다.

기억나지 않던 것들이 기억나기 시작한다고

살인자가 대답한다.

 

불을 켜니

불을 끄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하던 생각을

이어서 하게 되고

 

우리 건물이

흰 안개에 싸여 있단 걸 나가서야

알게 되었다.

 

 

―임솔아

 

 

【산책】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토끼가 나오던가.

매트릭스에서도 아마 토끼가 나오나?

 

하얀 토끼를 따라서 가면 이상한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하얀 토끼를 따라가다 보면 매트릭스에 갇히게 되고……

 

하얀,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다.

기억을 잃다.

 

망각,

우리는 기억을 잃는 대신 무엇을 얻게 되는가.

평온? 아무런 욕망이 없는 열반!

혹은 다른 말로 죽음!

 

하얀 토끼는 사냥꾼에 쫓기다 어디로 들어가는가.

 

 

불을 끄니

불을 켜고 있을 때의 내 생각을 누군가

훤히 읽기 시작한다.

 

정말 누군가 내 생각을 읽는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끔찍하다!

 

불을 켜니

불을 끄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하던 생각을

이어서 하게 되고

 

누군가의 생각을 내가 이어서 하면

누군가의 생각을 내가 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부터는 내 생각이 되는 걸까.

 

내 생각을 읽은 누군가와

누군가의 생각을 이어서 하는 내가

만나는 지점은 어디일까.

 

하얀,

망각과 기억의 끝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서부터 기억이, 어디서부터 망각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지점에서 필름이 끊긴 것일까.

하얀 토끼를 따라가 보면 필름을 이을 수 있을까.

 

불 켜진 내 생각과

불 꺼진 누군가의 생각이 만나는

맹점.

 

 

밖에 나와서야

내가 하얀 안개에 뒤덮여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나의 밖은 불이 켜져 있을까.

아니면 불이 꺼져 있을까.

 

어느 건물로 들어간다는 것은 기억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인데

건물 밖으로 나와 건물이 하얀 안개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기억의 문을 닫고 도대체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밖에서 바라보는 나의 기억의 건물

하얀 안개에 덮여 있기에 나조차도 잘 알아볼 수 없는데……

 

 

무의식 속에서 나는 살인자가 된다.

아니면 살인자가 나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토끼를 씻기면 죽는다.

토끼를 잘 먹이면 버릇이 없어져 죽는다.

 

무의식은 기억을 되살린다.

기막힌 살인의 추억을!

 

그것이 토끼든 토끼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든

죽는 것이 나이든, 누군가이든,

하얀 토끼를 따라 무의식의 층위를 거슬러가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꿈들, 욕망들, 혹은 다른 몇몇 생각들.

 

밖에서 보면 모두 다 하얗게 안개에 싸여 있다.

 

한 마리의 토끼를 따라 가보았더니

수백만 마리의 토끼가 안개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얀 토끼를 따라가라!

환상을 횡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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