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임솔아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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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임솔아 <나를>

by 브린니 2022. 4. 30.

나를

 

 

내 그림자로 인해 나는 나를 구경할 수 있다. 그물처럼 서로의 그림자가 겹쳐질 때 그곳은 우리의 집이 된다. 아무나 밟고 지나갔으나 아무리 밟아도 무사해지는 집이 느리게 방바닥에서 움직인다.

구름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들어오면 창밖의 먼 곳에서 바람이 분다. 구름 그림자는 발끝부터 나를 지나간다. 날벌레 한 마리가 구름 그림자를 드나들고 먼 것들이 틈틈이 나를 뒤덮는다.

나는 오랫동안 있다.

그림자는 목숨보다 목숨같다. 나는 아무것에나 그림자를 나눠준다.

아무와 나는 겹쳐 살고 아무도 나를 만진 적은 없다.

 

―임솔아

 

 

【산책】

 

임솔아의 시는 화려한 수사가 많지 않다. 덤덤하게 마치 산문을 쓰듯 현실상황에 대해 서술한다.

그 속에 시인의 진심 혹은 사물의 진실을 담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시는 약간 동화 같은 수사가 펼쳐진다.

구름의 그림자!

 

구름에 그림자가 있다고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혹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름의 그림자를 이야기하면 약간 동시 같은 느낌이 난다.

하지만 이 시의 구름의 그림자는 좀 다른 느낌이다.

 

맑고 뭉게구름이 뜬 날은 소풍을 가고 싶어진다.

날씨가 흐리고 구름이 많이 낀 날은 몹시 우울해진다.

 

그런데 구름의 그림자가 우리집 방안으로까지 드리우면 어떤 느낌일까.

알 수 없다.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구름의 그림자가 방바닥을 쓸고 지나가는 모습을 진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사람의 그림자와는 다른 어떤 초자연적인 느낌?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구름의 그림자는 햇빛이 사물에 비춰서 생기는 그림자와는 다른 것일 게 분명하다.

구름은 햇빛과 무관하게 자신의 그림자를 만든다.

 

그리고 그 그림자로 사람과 어울리고 사물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구름의 그림자는 그냥 그림자보다는 더 가볍고, 덜 어둡고, 포근하다?

 

 

그림자는 겹칠 수 있다.

사람은 사람끼리 겹치기 힘들다.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 사람은 사람과 겹치지 않는다.

서로 피해간다.

 

나는 나를 그림자를 통해 본다.

나는 나를 볼 수 없지만 그림자를 볼 수 있고,

그림자를 통해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있다.

그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그림자가 없는 그는 아무하고도 겹칠 수 없다.

 

 

그림자가 겹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림자는 서로를 만질 수 없다.

겹치는 것과 만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아무와 나는 겹쳐 살고 아무도 나를 만진 적은 없다.

 

그림자로 사는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그림자 취급을 할 때 겪었던 모욕을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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