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정한아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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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정한아 <첫사랑>

by 브린니 2022. 5. 2.

첫사랑

 

 

 

한밤의 어둔 소나기 몰고 오는

중폭 된 침묵

한 방울의 죽음도 비참하지 않은

 

삶의 날카로운 틈에 죽음을

책갈피처럼 끼워 넣고 너는

그 페이지의 여백에 이상한 메모를 남겼다;

 

느닷없는 잡담과

심혈을 기울인 농담

계산되지 않은 서서 구조

지리멸멸한 반전의 연속

갑작스런 암시, 그러나

 

이 모든 엉성함을 뛰어넘는

후회 없이 깊은 폐광으로 떠난 잠수부의

위험한 영광에 찬 단 한 번의 모험

 

오랫동안 속으로 타오른 우리는

빛나는 한 덩어리의 광물이 되었으니

 

끝까지

더 끝까지

 

가장 뜨거운 별은 푸른 별

거기에 넣으면 재가 되리라

 

 

―정한아

 

 

【산책】

 

첫사랑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사람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어떤 사건들을.

함께 걸었던 길들을,

맞잡은 두 손을,

함께 앉았던 벤치를,

 

버스 손잡이, 버스 자리, 버스 종점

혹은 지하철.

 

놀이공원,

그 집 앞 파란 대문.

 

울리지 않는 전화

읽지 않고 반송된 편지.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첫사랑을 할 때부터 우리는 왜 죽음을 생각할까.

죽어도 좋아.

죽도록 사랑해.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거야.

 

왜 죽음은 사랑 근처를 배회하는 것일까.

왜 죽음은 사랑과 왜 친숙할까.

 

죽음은 사랑의 이웃!

 

첫사랑도 아닌 풋사랑일 때부터

우리는 죽음을 떠올리며 비장해진다.

 

끝까지

더 끝까지

 

가장 뜨거운 별은 푸른 별

거기에 넣으면 재가 되리라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의 끝까지 가보려는 욕심이 생기고,

그 끝이란 게 결국 죽음을 거라고 믿고 보는

그래서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한다!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인 것처럼

이번 사랑 뒤에는 더 이상 사랑 따위는 없다는 식.

 

사랑이 처음부터 죽음이라면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은 죽음을 되풀이하는,

부활과 환생을 반복하는,

어쩌면 아, 우스꽝스러운 사랑놀이

혹은 죽음 게임.

 

 

언제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랑하라!

 

오늘만 수없이 반복되는

끝이 다시 끝나는,

끝만 되풀이 되는.

 

죽고, 다시 죽고, 죽어서

오늘만 살고 살아서

빛나는 하루살이 별,

 

푸른 별 ― 사랑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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