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한밤의 어둔 소나기 몰고 오는
중폭 된 침묵
한 방울의 죽음도 비참하지 않은
삶의 날카로운 틈에 죽음을
책갈피처럼 끼워 넣고 너는
그 페이지의 여백에 이상한 메모를 남겼다;
느닷없는 잡담과
심혈을 기울인 농담
계산되지 않은 서서 구조
지리멸멸한 반전의 연속
갑작스런 암시, 그러나
이 모든 엉성함을 뛰어넘는
후회 없이 깊은 폐광으로 떠난 잠수부의
위험한 영광에 찬 단 한 번의 모험
오랫동안 속으로 타오른 우리는
빛나는 한 덩어리의 광물이 되었으니
끝까지
더 끝까지
가장 뜨거운 별은 푸른 별
거기에 넣으면 재가 되리라
―정한아
【산책】
첫사랑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사람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어떤 사건들을.
함께 걸었던 길들을,
맞잡은 두 손을,
함께 앉았던 벤치를,
버스 손잡이, 버스 자리, 버스 종점
혹은 지하철.
놀이공원,
그 집 앞 파란 대문.
울리지 않는 전화
읽지 않고 반송된 편지.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그런데 첫사랑을 할 때부터 우리는 왜 죽음을 생각할까.
죽어도 좋아.
죽도록 사랑해.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거야.
왜 죽음은 사랑 근처를 배회하는 것일까.
왜 죽음은 사랑과 왜 친숙할까.
죽음은 사랑의 이웃!
첫사랑도 아닌 풋사랑일 때부터
우리는 죽음을 떠올리며 비장해진다.
끝까지
더 끝까지
가장 뜨거운 별은 푸른 별
거기에 넣으면 재가 되리라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의 끝까지 가보려는 욕심이 생기고,
그 끝이란 게 결국 죽음을 거라고 믿고 보는
그래서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한다!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인 것처럼
이번 사랑 뒤에는 더 이상 사랑 따위는 없다는 식.
사랑이 처음부터 죽음이라면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은 죽음을 되풀이하는,
부활과 환생을 반복하는,
어쩌면 아, 우스꽝스러운 사랑놀이
혹은 죽음 게임.
★
언제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랑하라!
오늘만 수없이 반복되는
끝이 다시 끝나는,
끝만 되풀이 되는.
죽고, 다시 죽고, 죽어서
오늘만 살고 살아서
빛나는 하루살이 별,
푸른 별 ― 사랑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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